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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나의 첫 집

"집이 좀 좁긴 한데 그래도 애들이 쓸 방은 크게 나와서 하나씩 자기 방 만들어주면 좋을 거 같아."


서울 변두리에 분양받은 아파트의 사전점검이 있는 날 함께 가기 위해 차에 오르는 엄마에게 말했다.

나는 29평형, 전용면적으로는 74제곱미터의 내 첫 집을 결코 작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무슨 일에서든 단점을 곧 잘 찾아내고 그것을 걸러내지 않고 말하는 것이 솔직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김이 팍 새거나 화가 나곤 했지만 특별히 반박할 수는 없는 문제였으므로 속으로만 삭여 왔다. 


엄마를 보자마자 문득 이제 막 지어진 그 아파트가 43세 내 인생의 성적표 같은 느낌이 들며 이후 받을 평가가 두려워졌다. 때때로 엄마의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가 두고두고 나를 그 생각에 머물게 했다.  부정적인 말을 선수 치는 것은 나름의 방어기제였다. 적어도 엄마가 내 기분을 생각해서 "그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할 가능성이 더 커지게 만든 셈이었다.


"느그 넷이 살기는 딱 좋다."


엄마가 대충 집을 한 바퀴 휘 둘러보며 한 첫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부담감이 안도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제야 거실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멀리 바라보기 위해 거실 창문을 열자 10월의 상쾌한 바람이 훅 밀려들어왔다. 


"여기다가 이제 우리 집을 지을 끼다"


내가 8살이 되던 해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외갓집 옆 빈 공터를 바라보며 사뭇 비장하게 얘기했었다.

공터를 그냥 내버려 둘 리 없는 외숙모와 동네 아낙들이 파, 고추, 가지, 호박등 당장 반찬거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각종 채소들을 심어 놓은 땅이었다. 엄마는 의지할 수 없는 알콜 중독자 남편 대신에 일찍 철든 첫째 딸인 나에게 원대한 계획을 처음 밝히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밭 위에 어떤 무수한 과정을 거쳐야만 집이 생겨나는 것인지 상상이 되지 않아 물끄러미 엄마를 올려다보았을 뿐이었다.


그때 우리는 외갓집의 뒷방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할머니 이야기에 의하면 6.25 때 전쟁을 피해 부산의 어느 산중턱에 자리 잡은 게 지금의 외갓집 터라고 했다. 외갓집은 제법 터가 넓어 집 앞에는 대추나무, 석류나무, 무화과나무, 감나무 등 과실수뿐만 아니라 동백나무도 대문에서 현관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심어져 있었다. 할머니와 외삼촌네 식구들이 사는 집의 현관을 지나쳐 집을 한 바퀴 돌듯 왼쪽으로 돌다 보면 뒷마당 입구즈음 우리가 살던 뒷방 출입문이 나왔다. 


문을 열면 부엌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시멘트 바닥의 작은 현관 겸 재래식 부엌이 있었고 방으로 통하는 미닫이 문이 맞은편에 있어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4명이 누우면 꽉 차는 이 작은 방의 세간살이라곤 한쪽 벽면을 채우다시피 한 두 개의 서랍장이 다였다. 한쪽 서랍장 위에는 채널 버튼이 빠진 채 화면을 연속해서 15분 이상 보여주기 힘든 망가지기 일보직전인 TV가 올려져 있었고 그마저도 너무 높아 바닥에 앉아 TV를 보기엔 목이 너무 아팠다. 


어린 나에게도 그 방은 너무나 좁아서 잠을 잘 때만 기어들어가는 곳일 뿐이었다. 주로 외갓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동갑내기 사촌의 텃세가 어찌나 심한지 조금만 기분이 나빠져도 나와 내 남동생을 내쫓아 버렸다. 날씨가 좋을 때는 이 산 저 산을 떠돌며 놀았지만 추위가 심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아빠가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그 좁고 어두운 뒷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집을 지을 거라는 그 공터는 딱 봐도 뒷방보다는 커 보였다. 어쩐지 지금보다는 내 삶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그날 밤 나는 기분 좋은 꿈을 꿨던 거 같다.


엄마는 퇴근시간이 매우 늦은 신발 공장에 미싱사이자 관리자로 일하고 있었다. 엄마가 대낮에 집 짓는 현장을 챙길 수는 없었으므로 매일 출근 전에 미숫가루를 타서 공사장 인부들이 먹을 음료를 준비해 두었다. 나름의 잘 부탁드린다는 마음의 표시였다. 나는 엄마를 대신해 하교 후 아저씨들께 미숫가루를 건네는 게 일과가 되었다. 감독관처럼 우리 집이 조금씩 지어지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봤다. 오늘은 또 얼마큼 지어졌을까 학교에서 돌아오는 내 발걸음은 곧 터질 것 같은 풍선같이 가벼웠다.


"영은아, 요새 동사무소에서 사람이 나와가꼬 짓고 있는 집들 다 뿌수고 댕긴다 카드라. 느그 엄마한테도 조심하라고 해라."


인부아저씨들이 커다란 체망에 시멘트를 곱게 거르는 모습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지나가는 동네 아주머니가 걱정하듯 말씀하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와 엄마마저 미간을 찌푸리며 점방(동네 구멍가게의 경상도 사투리) 할머니네 집을 동사무소에서 강제 철거시킨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부산의 산 중턱에는 조금만 빈 땅이 있어도 사람들이 우후죽순으로 무허가 집을 지어댔다. 집들이 생기고 나면 갑자기 없던 골목이 생기고 학교 가는 길이 여러 갈래로 나눠지곤 했다. 우리 집이 지어지는 곳은 산꼭대기에서 20여 미터 남짓 아래로 내려온 중턱이지만 꼭대기에 위치한 묘지 옆에도 집들은 지어졌다. 


동네 안에 있는 묘지는 아이들에게 더 이상 무서운 곳이 아니었다. 우리는 묘지를 미끄럼틀 삼아 오르락내리락 놀았으며 심지어 아침에 무덤에서 보자는 둥 약속 장소로 정하기도 했다. 오히려 묘지는 조가비처럼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에서 아이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공터이자 놀이터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무덤만 빼고는 다 집을 짓는 동안 동네는 조금씩 더 확장되었고 골목은 더 구불구불해졌으며 궁핍한 사람들은 더 몰려들었다. 내가 살던 동네는 산의 앞쪽과 뒤쪽에서 각각 동네가 형성되다가 결국에는 산꼭대기에서 동네끼리 이어져 산을 넘으면 다른 동으로 넘어가는 것이 가능할 지경이 되었다. 다행인 것은 막상 집을 다 짓고 나면 헐지는 못했는데 짓는 도중에는 누군가 신고하면 철거당할 수 있다는 점이 나에겐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니었다. 


"아저씨 어디 가시는데요?"


그날부터 나는 우리 집터를 지나가는 골목 한쪽 입구에 서서 처음 보는 아저씨가 지나갈 때마다 도끼눈을 뜨고 맹랑하게 물었다. 만약 우리 집을 철거하러 나온 공무원이라면 거짓말을 해서 유인하거나 그게 안 먹힐 때는 다리라도 물어버릴 심산이었다. 보통 아저씨들은 저 꼬마가 무슨 시답잖은 소릴 하나 시큰둥하게 지나치거나 "와 통행료라도 받을라꼬?" 하며 웃으며 지나갔다.


나는 한 살 어린 내 남동생에게도 다른 쪽 골목 입구를 지키도록 시켰지만 금세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저녁마다 남동생을 닦달도 해보고 달래 보기도 하면서 철석같이 약속을 받아내도 다음 날은 똑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돈은 좀 줏나?"


밤늦게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리다 얕은 잠이 든 그때 방 문 앞에서 낮게 속삭이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잠이 깼다. 무슨 비밀 얘기라도 하는지 엄마는 들릴 듯 말 듯 할머니 보다도 더 낮은 목소리로 오늘 평소보다 더 늦은 이유를 설명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째됐노?" 할머니의 물음에 엄마는 헛헛한 웃음인지 속상함인지 모를 뉘앙스로 "좋다고 가 갖지 뭐."라고 대꾸했다. "됐다 그라모. 들가 자라" 갑자기 커진 할머니 말소리에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자는 척 이불을 뒤집어썼다. 곧이어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기척이 뒤따랐다.


엄마가 누구에게 돈을 줬는지 누가 지지리도 가난한 우리 집 돈을 가져갔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를 더 가난하게 만든 그 사람이 원망스러우면서도 더 이상 집이 부서질까 봐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거 같은 안도감이 들었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어른들에겐 나름의 해결 방식이 있다는 점이 엄마를 믿을 만한 진짜 어른처럼 느껴지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레트 지붕의 우리 집이 완공되었다. 화장실도 푸세식이고 욕실도 바깥에 있긴 했지만 방이 3개였고 입식부엌이 갖추어진 나름 그 동네에선 최신식 집이었다. 그중 방 한 칸과 거기 딸린 좁다란 창고 같은 재래식 부엌은 외갓집의 셋방처럼 엄마도 세를 줄 거라고 했다. 첫날은 그렇게 가족들과 집안 구석구석 둘러보면서 넓어지고 좋아진 환경에 들떴다. 이제는 외갓집에서 시간을 보내도 되지 않아서 좋았다.


하지만 동화 속 결말처럼 그 집에서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산 것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여전히 추웠고 쓸쓸했고 내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그 집이 너무 떠나고 싶어서 지긋지긋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마치 내 발목을 잡고 있는 오래되고 쓸모없는 짐덩어리 같은 느낌이었다. 가족들이 집을 먼저 떠나고 내가 마지막으로 그 집을 벗어나 대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할 때는 이 동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랫동안 나는 그 집을 잊고 살았다. 그 집을 떠난 지 10년이 훌쩍 넘었을 때 그 집의 일부가 도로에 편입되어 헐리게 될 거라고 연락이 왔다.


세월이 흐르면 기억은 미화되어 추억이 되는 것일까.

광활하고 텅 빈 우주라는 공간 속에 아주 아주 낮은 확률로 존재하는 별처럼 나에게도 그 집에서 보낸 반짝이던 기억이 있다. 


해가 쏟아져 들어오던 마루에서 눈을 감으면 노곤 노곤해져 달콤한 낮잠을 자고 좁디좁은 주방에서 할머니, 엄마와 함께 동그란 밥상에서 뜨거운 고구마를 먹기도 했다. 엄마가 퇴근하면서 철커덩 철대문을 잠글 때에는 동네 개들이 순식간에 여기저기 짖어대는 바람에 "시끄럽다"라고 호통치는 어른들의 우렁찬 목소리도 나를 웃게 만들었다.


집을 허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우리 가족의 과거와 그 시절이 이제는 실체가 사라지고 파편화된 기억으로만 존재하게 될 것이 왠지 서글퍼졌다.


범천동 산 38번지.

주소에 산이라는 글자가 딱 박혀 있어 원래는 집이 아니라 산이었음을 증명하던 집주소.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소에서 내려도 15분 이상을 걸어 올라와야 했던 차도가 없던 동네. 

어두운 밤길이 엄마를 삼킬 거 같은 불안함을 안고 홀로 잠을 청하던 내 어린 시절이 잠들어 있는 곳.

술 주정뱅이 아빠와의 마지막 기억이 깃든 집.


이제 엄마와 나의 그 집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집의 일부는 도로가 되었고 나머지 일부는 한참 뒤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지금은 당시 서글펐던 마음으로부터도 더 멀리 왔다. 

그런데 문득 생애 첫 집을 마련한 이 순간 느닷없이 선명하고도 아련하게 그 집은 나를 다시 찾아왔다.


"여기가 내 첫 집이야"


엄마가 어린 나에게 했듯이 나도 엄마에게 웃으며 말해 보았다.  

엄마도 나처럼 그 시절의 우리 집을 떠올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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