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모르는 아이의 절망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처음부터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냥 매일 술을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항상 술에 취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술에 취한 채로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다 술에 못 이겨 잠을 자고 잠에서 깨면 술이 덜 깬 채로 다시 술을 찾던 사람이었다.
아빠가 어눌하지 않게 말하거나 비틀거리지 않게 걷는 모습은 내 기억상으론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
그런 날은 바로 망가진 간이나 위, 혹은 알코올 중독치료를 위해 병원에 강제 입원한 후 퇴원한 당일이었을 뿐이다.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는지는 모르겠다. 새엄마 밑에 자란 불우한 어린 시절이라든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았던 좌절 때문일 거라고 엄마는 말했지만 스스로를 망쳐가며 인생을 포기할 마땅한 이유처럼 보이진 않았다. 진지하게 술을 마시지 말라는 부탁을 하기에도 너무 절망적인, 아빠는 그 자체가 커다란 살아있는 암덩어리 같았다.
그 암덩어리는 슬금슬금 우리마저도 포식하거나 스스로 자멸해서 사라지는 방법밖에는 없어 보였다. 그것이 다시 정상 세포가 되기엔 달에 홀로 남은 사람이 우주선을 만들어 지구로 다시 돌아오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여정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만큼 우리의 세계에선 멀어졌고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차원에서 아빤 홀로 살고 있었다.
나와 내 남동생은 아빠에겐 술 심부름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동네에 단 두 개 있는 가게에선 외상이 많이 밀린 아빠에게 술을 팔지 않았고 그나마 아이들인 우리가 가서 애걸하면 불쌍해서 주는 식이었다. 아빠는 돈이 있든 없든 매일 우리를 내보내 술을 가져오도록 시켰다. 내가 누군지도 모를 만큼 멀리 떨어진 가게에서 우리 집을 설명하며 외상을 해야 하는 수치심보다 외상은 안된다고 거절당하는 비참함보다 거리를 떠돌아야 하는 피곤함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술을 구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몇 시간이고 가게를 찾아 헤맸다. 배고픔은 덤이었다.
술을 가져오지 못하면 우리는 엄마가 올 때까지 떨어야 했다. 화가 난 아빠는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지기도 하고 우리를 때리기도 했으니 우리 눈엔 그저 먹이를 찾지 못해 포악해진 괴물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괴물에 맞설 만큼 크지 않았고 괴물은 우리 처지를 불쌍하게 여길 만큼 인간적이지 못했다.
그런 아빠에게서 우리를 구해줄 구원자는 엄마뿐이었지만 엄마는 너무 바빴다.
엄마는 우리 네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고 공장에서 밤낮없이 신발을 만드는 미싱사였다. 엄마는 건강이 걱정될 만큼 너무 오랫동안 일했다. 엄마가 출근하는 소리에 잠이 깨고 퇴근하기도 전에 잠드는 날이 일쑤였다. 때때로 아빠가 동네 어느 곳에든 널브러져 자는 바람에 하던 일을 중단하고 엄마는 아빠를 찾으러 가곤 했다. 엄마보다 덩치가 큰 아빠를 둘러업고 일찍 오는 날은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를 볼 수 있어서 기뻤다. 나는 과도하게 엄마에 목말라 있는 딸이었다.
견디다 못한 내가 엄마에게 아빠를 두고 도망치면 안 되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엄마는 그렇게 해도 아빠가 동사무소에서 우리 집 주소를 알아내 우리를 찾아올 거라고 해서 어린 마음에 굉장히 낙담했었다. 엄마는 새벽부터 일을 나가 밤늦게까지 집에 없으니 우리가 겪은 고통이 그렇게 큰 줄 몰랐다는 사실을 성인이 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엄마와 내가 느낀 고통의 간극이 너무나 커서 참으로 허탈하고 서러운 순간이었다. 물론 우리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했다 해도 엄마가 도망치는 선택을 했을지는 미지수다. 어쩌면 끝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른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을 아이들에게 세심하게 알려주지는 않던 시절이었으므로 내가 가진 정보로 내 삶을 예측하기란 어려웠다. 나는 무자비하고 불안한 정글 속에서 하루하루 생존만 생각하며 살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런 내 감정 따위엔 관심이 없었으므로 이 극한 상황은 좀처럼 끝날 거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학교 생활은 멀쩡하게 잘했다.
아니 오히려 학교는 탈출구이자 나를 치유하는 장소였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나를 위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안전함이라는 산소를 주입받은 환자처럼 숨통이 트였다. 여기서는 두려움에 떨지 않고 웃을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고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여기서만은 공부를 잘하고 싶고 그림을 잘 그리고 싶고 친구들이랑 노는 게 좋은 평범한 아이일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수업 중에 아빠가 찾아왔다.
복도 끝에서부터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
학교의 엄숙함과 평온함을 깨부수듯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꼬부라진 내 이름.
술 취한 아빠는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찾고 있었고 당황한 선생님들이 미처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온 교실을 헤집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 머리가 이 상황을 이해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내 몸에서 손과 발끝으로 피가 쫙 빠지는 느낌이 들었고 심장이 쿵하고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걸 들었다. 교실은 곧 웅성웅성 아이들의 호기심으로 가득 찼지만 나만큼은 옴짝달싹 할 수 없어 그대로 정지상태가 되었다.
실제로 몸은 정지했지만 빨리 나가서 아빠를 제지해야 하나 아니면 끝까지 모른 척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학교밖으로 도망쳐야 하나로 심한 내적갈등 중이었다. 내 내면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외부의 소음은 도리어 조용해졌다. 반 친구들이 나를 흔들어 내 의식을 깨울 때까지 얼마나 정지된 채로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모든 친구들이 나를 보고 있고 선생님이 복도에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소란을 최대한 교양 있게 대처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역부족임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조용히 가방을 싸고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차분하게 실내화 가방을 들고 교실밖으로 걸어 나왔다. 몇몇 아이들도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학교에서는 좀체 일어나 것 같지 않은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를 지켜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복도에서 막무가내인 아빠와 언쟁 중인 선생님께 고개만 꾸벅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 학교밖으로 빠져나왔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 방법임을 알았다.
갑자기 두 세배는 넓어진 것 같은 운동장을 걸어 나오면서 내 안에서 빠져나간 뜨거운 무언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앞서가는 내 뒤에서 욕을 하며 위협하는 아빠한테 뒤통수를 세게 맞아도 하나도 아플 거 같지가 않았다. 그러면 안 된다고 그래서는 안 됐다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과 그런 상식적인 말조차도 무의미할 뿐이라는 마음 중에 나는 자연스럽게 후자를 선택했다.
난 화가 나면서도 그 화의 진원지가 명확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내 사정일랑 봐주지 않는 아빠가 미운 게 다도 아니고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으로만 이뤄진 것도 아니었다. 나의 안전한 세상에 균열이 생겼고 그 균열은 더 커질 것이며 내게 평안함을 한 톨도 허락하지 않는 세상에 제일 화가 났다.
나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빠가 술을 먹고 수업 중인 학교에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면서 나를 창피하게 만들었노라고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바꿀 수 없는 영역 밖의 일이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다음 날엔 아무렇지 않게 다시 학교를 갔다.
몇몇 친구들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괜찮아?" 라며 물었지만 나는 "응"이라는 짧은 대답만 했다.
종종 아빠 흉내를 내며 짓궂게 놀리는 남자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에겐 나를 방어할 어떤 변명의 단어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를 두고 수군대는 주변인을 말없이 견뎌내는 것 밖엔 할 게 없었다.
선생님도 더 이상 묻기를 포기할 때쯤 본능적으로 감정이라는 것이 사라져 나에겐 고요함만이 남았음을 깨달았다. 나는 살기 위해 내 마음속으로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