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전시 서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윤선 Aug 25. 2024

깃털 몇 장

김다혜, 김지윤, 박수현, 임현정: 글라이딩 메모 나이트(그블루 갤러리)


with 김지윤 Kim Jiyoon

     그는 혼자 있을 때 주로 마주하는 생명체는 벌레였다고 말했다. 나도 그 장면을 아는 것 같다.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 내가 철저히 혼자가 될수록 벌레는 많아졌다. 축축함, 부패한 음식물 찌꺼기, 방치, 고온다습. 이것들은 벌레에게 최적의 생존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이 작고 부지런한 녀석들을 방해꾼이라 여기는 존재가 많아 봐야 고작 1명뿐이었다. 머릿수로 나는 그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항복을 선언한다) 그러니까 그 벌레들은 내 눈앞에 기어 나와서 내가 얼마나 혼자인지 알려주는 표식 같은 것이다.

     어제는 옷들 사이로 하얀 벌레를 발견했다. 그 옷은 엄마가 개 준 옷이고, 쿠키가 앞발로 열심히 헤집어 놓았던 옷이기도 하다. 엄마와 쿠키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옷. 그럼에도 이 틈에서 혼자라는 증표가 은밀하게 자리를 비집고 나온다. 모두가 때로 혼자가 된다는 그 중요한 사실을 누구도 잊어버리지 않도록. 벌레는 나에게 와서 내가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믿음이 모두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의혹을 제기해 왔다.

     이 글을 처음 쓰던 때보다 나는 지금 조금 더 벌레를 자주 마주친다. 그것(벌레 혹은…)이 주는 불안과, 그 불안에 익숙해져 버린 안일함과 함께. (중략)

정윤선, 「깃털 몇 장」 , 2024, 리갈패드 위 자필, 20.9 × 12.7 × (5) cm


with 박수현 Park Suhyun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세계라서 우리는 불안을 나눠 가지곤 한다. 라고, 서서히 힘이 풀려가는 손으로 쓴다. 뻣뻣하게 굳어지는 손을 극복한다거나, 이겨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럴 때는 애써 손을 움직이려고 발버둥 칠 게 아니라, 곁에 있는 누군가의 손으로 그 손을 감싸야 한다. 굳은 손에는 온기가 특효약이니까. 손가락 끝까지 따뜻한 피가 흘러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기념으로 내가 여행했던 세계들에 대해 써볼까 한다. 온갖 세계들 중에서 내가 유난히도 감당할 수 없었던 불안은 ‘생기’였다. ‘생기’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생기를 아름답다고 찬양했기 때문이다.(...)

내게는 불안의 세계로 가는 몇 갈래 길이 있다. 그 길은 별로 깊지 않아 보이지만 발을 디디는 순간 푹 꺼져버리는 늪으로 된 길. 영원히 되풀이되는 길. 당신도 그 길을 알고 있을 것만 같다.(중략)

정윤선, 「깃털 몇 장」 , 2024, 수제종이 위 자필, 18.5 × 14 × (5) cm


with 임현정 Yim Hyunjung

눈썹 칼과 면도기가 나를 깎아내고 나에게 명령하는 칼날이었다면, 이발기는 마치 나의 손톱이나 이빨 같았다. 잘못 쓰면 때로는 내 몸에, 내 피부에, 내 혓바닥에 상처를 내기도 하지만 나 자신의 일부이기도 한 것. 나의 부모와 선조가 남겨준 몸에 남아있는 도구. 내 몸이 선택한 생존의 전략. 눈썹 칼과 면도기가 나를 부정하는 의심의 칼이라면, 이발기는 내 몸이 기억하고 선택한 내 방 깊숙한 서랍 속의 연장.(...)

내가 스스로 머리를 정리할 때 나는 안다. 그 사이 머리가 얼마나 자랐는지, 얼마나 길었는지, 어느 곳의 머리털이 뻣뻣하거나 부드러운지, 어느 곳의 머리털이 회오리치며 제멋대로 자라는지. 내 머리를 내 손으로 자를 수 있게 되면, 내 몸을 타인의 지식에 따라 수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리고 내 마음에 들게 정리된 머리를 보면, 내가 원했던 바로 그 모습의 나를 볼 수 있게 된다. 내가 만든 내 모습. 내가 다듬은 나의 어제들. (중략)

정윤선, 「깃털 몇 장」 , 2024, 은색종이 위 자필, 7 × 105 cm


with 김다혜 Kim Dahye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Daum 혹은 Hanmail 주소로 메일을 보냈던가. 내가 보낸 메일 주소조차 찾을 수가 없다. 받는 사람의 주소와 보낸 사람의 주소가 모두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정윤선, 「깃털 몇 장」 , 2024, 포스트잇 위 자필, 7 × 7 × (52)cm

그건 발신자도 수신자도 놓쳐버린 문장들.(...)

(아마도 왜곡된 기억)(...)

처음엔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이 입 모양을 뻐끔거리던 입술.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말이 아닌 표정으로 존재하게 됐어. (...)

도자기 리트리버 인형, 레고 중에서 잠수부 헬멧과 금색 칼, 황토색 몸과 주황색 갈기를 가진 사자 인형. 그때 그것들은 내게 전부였는데. 어느 순간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게 사라져버렸다.(...)

아빠는 너무 갑자기 말도 없이 떠나버려서,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빠랑 얘기할 수 있는 틈이 있었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솔직히 나는... 결국은 또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정하고 순수한 질문이 익숙한 추궁과 책망으로 변하는 건 너무 짧은 순간.(...)

말 한마디 안 듣고, 말 한마디 안 남기고 사라지고(...)

사실 이 모든 게 다 주워온 게 아닐까.(...)

(중략)



《글라이딩 메모 나이트》 전시전경, 2024, 사진: 고정균 @goh_jk

배너 사진, 마지막 사진: 고정균 @goh_jk

(나머지 개인 촬영 사진)




*이 글은 글쓴이가 《글라이딩 메모 나이트》의 참여 작가들의 작업 과정을 함께 경험하면서, 작품에 글쓴이의 서사를 더해 쓴 서문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