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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선 Aug 05. 2020

흔들어 깨우는 생채기

허요 개인전 : 마디와 마디 _ 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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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누워서 잠을 자면 심장 소리가 더 잘 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 어릴 때는 그 소리가 무서워서 쉽게 잠들지 못했다. 잠이 드는 순간까지도 심장이 부담스럽게 생명력을 내뿜으며 두근거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고, 이 에너지가 어느 날 ‘이유가 없다’는 같은 이유로 멈추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즉 원인 모를 돌연사가 일어나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에 종종 빠지곤 했던 것이다. 신체에게 존재를 엄습당한 최초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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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디와 마디>라는 전시의 제목은 캔버스와 조형 작업을 신체의 어느 한 부분으로 바라보게 한다. 벽면의 회화 작품의 이미지는 캔버스 전면을 채우는 배경색과 그 위에 부조처럼 올라간 작은 밀랍 모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배경은 미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위에 밀랍은 뼈나 마디를 단순화한 길쭉한 도형으로 올라가 있다. 팔꿈치나 무릎과 같은 신체의 특정 부위를 그려내는 이 도형들은 사각형을 이루며 모여있고 반복은 패턴을 형성한다. 이 뼈대들은 가장 효율적인 위치에 자리를 잡은 것 같기도 하고 가장 아름다운 위치에 자리를 잡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전시장의 다른 곳에는 근육과 뼈마디를 느슨하게 재현한 입체 캔버스 《마모되는 부위》시리즈와 석고 조형물《토막》이 보인다. 부분으로서의 뼈대라는 자리를 이탈한 이들은 아슬아슬한 무게중심으로 쌓여있고,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렬로 줄 서 있다. 이것이 뼈대라면 이 근처에 또 다른 신체 부위가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하게 명시되어있지는 않지만 캔버스의 표면은 피부를 연상시킨다. 작가가 직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뼈’와 ‘마디’라면, 여기서 ‘피부’는 작품에서 살펴보아야 할 또 다른 질감은 아닐까?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는 뼈대가 아닌, 피부라는 이 캔버스의 가장자리에서부터 작품을 매만져본다.


회화 작업 《여리여리한 뼈대》의 바탕은 노란색이나 분홍색 혹은 하늘색에 가까운 미색으로 채워져 있다. 캔버스의 표면은 독특하다. 작품의 재료가 되는 밀랍은 건조한 무광의 질감을 만들어내고 이 밀랍은 물감 안료와 섞여 작품에 색을 더한다. 덕분에 질감과 색감은 균질하지 않게 퍼져있다. 언뜻 보면 안개가 캔버스 주위를 둘러싼 것처럼 희미한 질감과 색감의 차이가 곳곳에서 느껴진다. 멀리서 보면 차이를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가까이에서 작품의 표면을 관찰한다면 같은 색이라도 부분마다 채도와 명도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름이 뜬 하늘처럼, 아니면 당황해서 붉어진 두 뺨처럼 색은 어느 곳에 뭉쳤다가 살짝 자리를 비켜 다시 흩어진다. 재질과 색감에서 섬세한 차이를 드러내는 평면은 방해물 없이 미끄러지는 매끈한 표면과는 거리가 있다. 이 표면을 만져본다면 어떨까. 불규칙한 평면은 단지 평면으로 머무르지 않고 예민한 촉감을 상상하게 한다. 더 가까이서 보면 회화의 표면에서 크레파스 가루가 뭍은 듯이 툭툭 던져진 작고 붉은 흔적들도 발견할 수 있다. 점이라고 하기에는 방향과 형체가 있으나 일부러 그렸다고 하기에는 실수 같이 보이기도 한다. 안료의 뭉침과 흩어짐이 피가 튀긴 자국 같기도 하고, 모세혈관 같기도 하다. 세포와 혈관, 미세한 주름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피부와 닮았다.


인간의 신체가 그렇듯이 피부를 닮은 회화 작품의 표면은 획일적일 수가 없다. 표면은 물감의 안료를 휘저으며 불규칙함과 불안정함을 발생시킨다. 하지만 뼈대를 닮은 밀랍 덩어리가 이룬 사각형의 격자 무늬는 이 위에 다시 구조를 형성한다. 입체 캔버스와 석고 조형의 뼈대도 마찬가지다. 석고 조형 작품은 손끝에 눌린 자국이나 모서리의 부스러짐 같은 의도적인 빈틈을 가지고 있고, 넘어질 듯 말 듯 불안하게 쌓여 있다. 입체 캔버스 작품 역시 뼈를 잇는 근육과 관절을 묘사하지만, 점토의 무른 성질에 의해 조물조물 손길 담고 있다. 이들은 신체의 일부로서 그것을 담는 구조를 상상하게 함과 동시에 그 구조를 교묘하게 벗어난다. 네모나고 각진 틀 안에 불안정하고 불규칙한 피부와 마디, 근육이 생동한다. 허요의 작품은 구조를 이루는 뼈대에 담긴 유연한 신체를 통해 안정과 불안정 사이에 있는 삶과 세계를 은유하고 있다.


3

혹시 좀 전에 발견한 작고 붉은 흔적들 뾰족한 것에 긁힌 생채기는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투명하고 여린 피부에 난 생채기를 보고 있던 걸까. 앗, 따끔하다. 괜히 내 피부를 쓱 한번 쓸어본다. 방금 쓸어내린 내 피부도 가까이서 본다면 그림에서처럼 불규칙한 질감과 색감이, 어떤 흉터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 피부의 생채기가 불러일으킨 따끔함 신체와 삶을 더 예민하게 감지하게 한다.


어떤 날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삶이 가진 생동감 때문이다. 돌연사를 걱정하던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지금의 나는 심장의 두근거림과 불규칙함이 익숙하다. 그것들의 존재가 너무 당연한 것이 되어서 신체와 삶은 언젠가부터 생존을 위한 도구가 되어버린 것 같다. 신체와 삶이 도구가 될 때 이것은 목적을 필요로 다. 그런데 그 목적이 사라지거나 달성할 수 없는 것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도구일 뿐이라면, 적을 잃은 연의 작동은 중지될지 모른다. 래서 나는 신체와 삶이 도구이기 이전에 그 자체을 기억하고 싶다.


익숙한 일상을 반복하다가 전시장에서 본 작품이 건주었던 감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 허요의 작품이 주는 은유 다시 기억 때면 살짝 즐거워진다. 그것은 심장의 두근거리는 소리를 듣다가 이제는 깊은 잠에 빠져버린 나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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