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비가 반으로 줄었고, 식비도 조금 줄었다.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니 시간도 절약되었다. 사회적 활동에 물리적인 내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꽤 경제적인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비대면의 경제는 절약 이면에서 또 다른 자원을 필요로 했다. 그 자원이란 '개인적 공간'이었다. 온라인으로 수업할 때 화면에 가족의 모습이 나오거나 주변의 소음이 끼어들면 타인에게 피해가 될뿐더러 사생활이 드러나기 때문에 시각적, 청각적으로 방해가 없는 공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각자 구별된 공간보다 구별되지 않은 공간이 더 많았던 우리 가족에게, 서로의 방해가 없는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화상 수업', '재택근무'처럼 다양한 활동이 '재택형'으로 변화하는 데에는 '누구나 개인적인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공간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화상 수업에서 주변의 간섭을 느끼며 음소거 버튼을 누르고, 비디오 화면을 끈 채 모습을 감추어야 했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쉽고 당연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공간의 부족은 팬데믹 시대에 특히 치명적이다.
개인적인 공간을 가지지 못한 사람 중에서 비대면 시대에 더욱 취약한 이들은 가정에서 폭력을 겪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집은 폭력의 주체와 마주칠 수밖에 없는 장소인데, 코로나19(COVID-19) 방역지침은 활동 범위를 주거 공간으로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활동 범위의 제한은 가족 외의 사람들이 피해자를 마주치기 힘들게 하여 가정 내 폭력을 한층 더 보이지 않게 한다. 가해자의 논리에서 폭력을 가할 이유는 늘고, 폭력을 가하지 않을 이유는 줄어든다. 방역지침이 강화되는 사이, 폭력은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서 더 짙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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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수면 아래를 길어 올리는 변하연의 <들여다보려고 애써야 한다>는 작고 흰 돌과 흰색 실이 만든 웅덩이로 전시장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돌과 실로 이루어진 웅덩이 위에는 투명한 유리 상자 6개가 서로 맞닿아 있고, 작고 흰 돌은 또 한 번 유리 상자의 바닥을 채우고 있다. 새하얀 돌 위로 짙고 검은 글씨가 보인다.
“왜 진작 헤어지지…어”
“맞을 만하니 맞았겠…”
“사람이 나빠서 그런…아니니 참고 살아”
문장 위에 놓인 납작한 투명 구슬은 중앙의 글씨는 더 크게, 가장자리의 글씨는 더 작게 보여준다. 때문에 문장은 한두 글자가 사라진 채로 읽힌다. 하지만 원래 문장을 추론하기는 어렵지 않다. "사람이 나빠서 그런…아니니 참고 살아”. 뉴스나 다큐멘터리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이 문장들의 변주를 나도 한 번쯤은 들어본 것 같다. 눈에 띄는 확대된 문장과 기시감을 일으키는 사라진 글자는 성찰 없이 내뱉는 습관적인 말들에 대해 유심히 생각하게 한다.
낯설지 않은 문장 사이에서 시선을 위로 올리면 낚시찌에 매달린 물고기를 닮은 형상이 두 덩이 보인다. 그 위로 “니가 잡힌 건 운이 없어서”, "그러게 잘 피하지 그랬어"와 같은 심상치 않은 문장이 쓰여 있다. 그런데 이 덩어리, 처음 보았을 땐 물고기 같았는데 한 덩이의 몸체가 주황빛이다. 형체도 물고기를 정확하게 재현했다기에는 오묘하다. 주황빛과 길쭉한 형체가 인간의 몸체를 떠오르게 한다. 아무래도 작품의 제목 <개인적 불운>에서 '개인'에 해당하는 것이 물고기만은 아닌 것 같다. 다른 한편에 놓인 영상 작업 <3인칭 아카이브>는 코로나19로 인해 심화된 가정폭력 문제를 주제로 사회복지학부 교수와 한국 여성의 전화 상담 팀장, 가정폭력 쉼터 시설장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영상 속 전문가는 코로나19가 가정폭력에 미친 영향뿐만 아니라, 가정폭력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 문제 해결을 힘들게 하고 있음을 전해준다. 영상을 보고 나니 낚시찌에 달린 것을 보며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던 이유, 그리고 한두 글자가 빠진 문장으로부터 어렵지 않게 완전한 문장을 떠올릴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작품 속 문장은 오늘날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 흔히 경험하는 편견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변하연은 우리 사회가 가정폭력 문제를 얼마나 '개인적이고', '피해자가 자초한',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작품을 통해 이야기한다.
집의 의미를 네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전시 《당신이 사는 곳》에서 변하연 작가는 팬데믹 시기에 가정폭력을 겪고 있는 여성들의 현실을 드러낸다. 여기서 작가는 이 여성들이 마주한 관습적 편견뿐만 아니라, 이들이 가정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을 살펴보는 데까지 나아간다. 팬데믹의 폐쇄적 특징이 피해자를 물리적으로 통제한다면, 피해자를 정신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이상적이고 전형적인 형태의 '정상 가족'이라는 관념이다.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그들을 폭력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게 한다.
본질은 결국 원인 것을, 2021, 혼합 매체, 가변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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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상태로 모여있는 조각난 원도 있고, 바람 빠진 축구공처럼 찌그러진 원도 있다. 손으로 빗어 만든 송편처럼 겉모양에 손자국이 남아있는 원도 있다. 또 어떤 원은 속이 비었고 어떤 것은 모양 그대로 공간을 채우고 있다. 동그란 모양의 틀 안에 들어간 원도 있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원도 있다. 색도 한 가지가 아니다. 작품 <본질은 원인 것을>은 여러 형태의 원을 모아놓고, 원은 깨지거나 찌그러져도 여전히 원이라고 불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작품 <어디에도 비정상적인 조합은 없다>는 집단의 정상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품을 이루는 정사각형 캔버스와 그 위에 놓인 스포츠용 공은 투명 비닐로 압축되어있다. 정사각형 캔버스 위에 놓인 공은 다른 공과 함께 있거나 홀로 있다. 여기서 공은 어떤 공과 함께해도 좋고 함께하지 않아도 좋다. 스포츠용 공이지만 튕기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는 둥근 것을 바라볼 때, 사실 이상적인 형태의 원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찌그러진 원도 타원이라고 부르고, 반이 잘린 원도 반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머릿속에 떠올린 모양과 다르더라도 충분히 그것으로 불릴 수 있기 때문에, 작가는 원을 모든 형태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이 원은 개개인을 의미할 수 있다. 우리도 생긴 모양은 다 다르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원은 부-모-자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 공동체를 의미할 수도 있다. 여기서 원은 누군가 부여한 용도에 따르지 않아도, 비슷한 모양끼리 있거나 그렇지 않아도, 숫자가 많아도 적어도, 심지어 홀로 있어도 충분하다. 변하연의 작품에는 다양한 모양과 다양한 조합이 공존하지만, 무엇도 그것을 부르는 이름에서 소외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비정상적인 사물도, 비정상적인 조합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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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가족'이라는 관념은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으로부터 멀어질 수 없게 하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개인적으로 만든다. 우리는 관습과 편견에 물든 언어 속에서 희미해진 폭력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우리 사회에서 정상성의 기준은 너무 뚜렷하다. ‘폭력’을 재단하는 기준이 분명해지고 ‘정상성’의 기준은 보다 흐릿해질 때, 우리는 문제를 직시하고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상적인 원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음에 담고, 찌그러지거나 반이 잘린 모양도 '우리'라고 불러 보자. 이 안에서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을 넘어서서, 자신을 돌보고 서로를 돌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단순히 ‘사는 곳’을 넘어서, 당신이 충분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