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를 알 수 없는 어떤 날의 기억과 그 기억을 떠올리느라 멈춰선 지금, 그리고 지난 시간을 참조해 상상해낸 실재하지 않는 미래. 우리는 단지 매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가 감각하는 시간은 한 점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는 몇 분, 몇 초 사이에도 수많은 과거와 미래를 오간다. 로르 프루보의 전시 《심층 여행사》는 우리가 감각하는 시간처럼, 여러 시제가 뒤섞인 공간에서 그 사이에 침입한 허구적 이야기를 들려준다. 로르 프루보의 작품 속 ‘혼재하는 시제’와 ‘허구’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어떻게 충돌을 일으킬까.
전시장은 크게 두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로 마주하는 어두운 방에서는 영상 작품 〈신앙적으로 돈 버는 방법〉과 평면 작품 〈올라가셨어야죠〉를 볼 수 있다. 몸을 숙여 다른 방으로 통하는 낮은 문을 지나면 〈아저씨의 여행사 가맹점, 심층 여행사〉를 만날 수 있다. 〈아저씨의 여행사 가맹점, 심층 여행사〉는 어느 한 부분에 설치된 작업이 아닌, 이 방 전체를 구성하는 공간 설치 작업으로 여러 지역의 가맹점과 연결되어 있다. 늘어놓은 듯한 공간 속 오브제들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 공간 안에는 독립적으로 영상 작품 〈여행 정보광고〉, 〈방랑자 – 벙커/통신 시퀀스〉도 각각 상영되고 있다. 전시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심층 여행사’는 이 전시의 핵심을 쥐고 있다. 먼저 수상쩍은 〈아저씨의 여행사 가맹점, 심층 여행사〉를 탐색해보자.
1 뒤엉킨 시제와 허구가 일으킨 오류
여느 여행사 사무실이 그렇듯 여행 상담을 나누거나 계약을 할 수 있는 몇 개의 책상과 의자가 있다. 벽면과 파티션에는 여행과 관련된 홍보 이미지와 메모, 지도가 촘촘하게 붙어있다. 홍보 영상 〈여행 정보광고〉도 보인다. 주의를 기울여 여기 놓인 사물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여행 정보광고〉 영상을 튼 모니터 위로 서로 다른 시간에 멈춰 있는 세 개의 시계가 눈에 띈다. 그 반대편 탁자 위에는 초록색으로 변질된 물이 담긴 어항과 그 안에 든 캠코더가 보인다. 낮은 입구 앞 책상 위에 놓인 라즈베리와 상담용 책상 아래 전기 플러그가 꽂힌 싹이 난 감자는 무방비하게 부패의 과정을 체험하고 있다. 아무래도 평범한 여행사 사무실이라고 하기에는 수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이질적인 오브제들은 이 공간이 익숙한 일상의 공간과는 다르다는 것을 직감하게 한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시간’과 관련된 의미다. 한쪽 벽면에 나란히 걸린 세 개의 시계는 각각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킨다. 합의된 하나의 기준으로 시간의 흐름을 배치하는 기존의 시간 체계에 반해, 여기 놓인 시계들은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면서 어느 시간이 우선하고, 어느 시간이 뒤따르는지 시간의 순서와 흐름에 혼동을 일으킨다. 어항 속 캠코더는 녹화한 영상을 플레이하거나 리와인드 하여 시간이 흐르는 방향을 조절할 수 있는 장치이면서도, 변질된 물속에 잠겨 또 다른 시제에 귀속되어 있다. 한편 부패한 감자와 부패할 예정인 라즈베리는 이 공간에 흐르는 물리적 시간을 주목하게 한다. 7개의 시퀀스로 구성된 영상 작품 〈방랑자 – 벙커/통신 시퀀스〉는 일반적으로 끊어짐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서사와는 다르게, 서사의 부분들을 단편적으로 연결해 구성되었다. 관람자는 압축되고 분절된 서사의 파편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시퀀스를 조합하고 서사를 구축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시간의 흐름을 하나의 고유한 방식이 아닌 다층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게 한다. 이곳은 시간의 흐름 속에 있으면서도 여러 시제와 시간의 층위, 방향이 포개지는 공간이다. 여기서 관람자는 기존에 인지하던 방식과는 다른, 여러 층에서 동시에 흘러가고 서로 부딪히며 작동하는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아저씨의 여행사 가맹점, 심층 여행사〉는 로르 프루보의 가상의 삼촌이 만든 회사 ‘심층 여행 주식회사 Deep Travel Ink.’라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로르 프루보의 작품에는 유독 할아버지, 삼촌, 할머니 등 가족의 이야기가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데, 작가는 자신보다 더 많은 시간의 축적을 경험한 사람을 현재라는 지점에서 불러온다. 작가는 가족의 행위를 이어가거나 그들으로부터 작품을 전달받음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중첩시킨다. 작가의 다른 전시와 작품에서도 계속해서 등장하는 ‘가족’이라는 소재는 각각의 작품과 전시를 연결하고, 다른 시제와의 만남과 협업을 일으킨다.
또한 작가는 인터뷰에서 가상의 개념미술 작가 할아버지의 이야기와 할머니의 조각품 이야기, 삼촌이 운영하는 여행사라는 가정을 사실처럼 들려준다. 작가의 태연한 태도와 생생한 묘사를 듣다 보면 점점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작가의 인터뷰까지도 작품의 일부일까? 그렇다면 ‘허구라는 설정’의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있을까?이러한 질문은 '어디까지가 작품이고 어디서부터 현실인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단지 믿음에 불과한지'에 대한 질문으로도 확장된다. 작가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설정을 통해 우리가 사실과 허구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으며, 우리가 믿는 것이 사실인지 허구인지 질문을 일으킨다. 로르 프루보의 허구적 설정은 방 한편 책상 위에 놓인 끈끈한 액체 덩어리가 묻은, 수면 아래 깊은 곳에서 끄집어올린 듯한 가족사진 액자처럼 서로 다른 차원을 연결한다. ‘사실과 허구’의 관계를 넘어서, ‘현실과 작품’, ‘진실과 믿음’이라는 서로 다른 차원을 연결하여 이분법적 경계를 흩뜨린다. 결과적으로 ‘심층 여행사’는 ‘혼재하는 시제’를 통해 기존의 시간 체계에 오류를 일으키고, ‘허구’의 개입을 통해 ‘사실/허구’와 같은 뚜렷한 이분법적 관념에 오류를 일으킨다.
2 메시지를 주입하는 '시스템'의 바깥을 향해
로이스 로리의 원작 소설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 <더 기버: 기억전달자>에서 주인공 '조너스'는 그들에게 제거된 기억을 전달받는 '기억보유자'의 임무를 맡는다. ‘조너스’가 기억을 전달받은 이후, 흑백이었던 영화의 화면은 다양한 색상을 가지게 된다. ‘조너스’가 기억을 전달받음으로써 사물과 세계의 진짜 색상과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본래 가진 다양한 감정과 자유의지를 깨달은 ‘조너스’는 결국 기존의 커뮤니티를 떠나 시스템 밖으로 탈출한다. ‘조너스’가 살던 커뮤니티의 지도자는 그들의 커뮤니티가 완벽한 행복을 보장하는 시스템이라며 구성원들을 세뇌시켰지만, 사실 이 커뮤니티는 인간이 가진 다양한 특성을 결함으로 보고 제거하는 시스템이었다. 영화는 우리가 속한 시스템의 실체를 우리가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세계를 지속하는 유일한 방식인지 질문한다. 로프 프루보의 〈신앙적으로 돈 버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가 속한 시스템을 폭로하고, 그 시스템의 바깥을 상상하게 한다. 지나왔던 낮은 문으로 돌아가, 영상 작품 〈신앙적으로 돈 버는 방법〉을 살펴보자.
영상의 속삭이는 목소리는 가방을 훔치라고 명령한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자신의 말만 따르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당신은 너무 행복해’라고 말한다. 영상의 화면에는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지시하는 이미지들이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간다. 목소리는 돈을 욕망할 것을,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행복을 보장할 것임을 끊임없이 세뇌한다. 영상의 전반부에서 모든 것을 욕망하기를 종용하던 목소리는 영상의 후반부에서 갑작스럽게 모래알과 별과 바다 등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라고 읊조리며 갈등을 해소시킨다. 모든 것을 욕망하도록 부추기던 목소리는, 모순적이게도 이미 당신의 곁에 있던 것들을 당신의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당신의 욕망을 이용하고 당신을 기만한다. 작품은 자본주의의 순간적인 메시지와 이미지가 어떻게 인간을 조종하고 인간에게 이념을 세뇌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메세지가 우리를 어떻게 기만하는지 보여 준다.
앞서 언급했던 ‘심층 여행사’는 무의식, 욕망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심층 depth’을 판매한다. ‘심층’의 실체는 다소 추상적이지만, ‘심층 여행사’의 홍보 영상 〈여행 정보광고〉는 실제 여행사들이 사용하는 키워드를 이용해 자본의 혜택을 강조하면서 관람자의 소비심리를 자극한다. ‘심층 여행사’가 ‘심층’을 판매하면서 개인의 소비주의를 자극한다면, 〈신앙적으로 돈 버는 방법〉은 소비주의가 어떻게 개인을 조종할 수 있는지 그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신앙적으로 돈 버는 방법〉은 보다 높은 곳에서 자본주의 사회 속 인간을 조망하면서 우리에게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세뇌하는 ‘시스템’ 자체를 폭로한다. 영화 <더 기버: 기억전달자>에서 사물의 원래 빛깔을 보고 커뮤니티를 탈출한 ‘조너스’처럼, 시스템의 실체를 알게 된 우리는 시스템 바깥을 상상하고 그 밖으로 향할 수 있게 된다.
3 세계를 인식하고 폭로하는 몇 가지 방식
세계를 다르게 인식하도록 곳곳에 단서를 남기는 로르 프루보의 시도는 〈아저씨의 여행사 가맹점, 심층 여행사〉에서는 환상적으로, 〈신앙적으로 돈 버는 방법〉에서는 정치적으로 느껴진다. 이처럼 세계를 다르게 인식하는 것, 그리고 ‘다르게 인식하기’의 방식조차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로 만드는 것이 로르 프루보의 방식이다. 전시장을 벗어나기 직전 문 앞에서 마주하게 되는 작품 〈올라가셨어야죠〉는 도스 프로그램 위에 뜬 오류창처럼 검은 보드 위에 쓴 흰 글씨로 관람자에게 말한다. “YOU SHOULD HAVE GONE UP”. 이 문장은 로르 프루보를 따라 시스템의 바깥을 상상해버린 당신을 애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 깨달음을 축하하는 반어적인 말장난일 것이다. 이 말장난이 동시에 가지는 두 가지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면 당신은 로르 프루보의 문법에 한 발짝 가까워진 것이다.
로르 프루보는 〈아저씨의 여행사 가맹점, 심층 여행사〉에서 ‘혼재하는 시제’와 ‘허구’를 통해서,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는 ‘시간 체계’와 ‘사실/허구’와 같은 이분법적 관념에 의문을 던진다. 〈신앙적으로 돈 버는 방법〉에서는 자본주의적 메시지를 주입하는 시스템을 조망함으로써 익숙한 시스템 바깥을 상상하게 한다. 또한 의문을 던지는 과정을 두 작품에서 환상적/정치적이라는 상이한 방식으로 보여 준다. 결과적으로 작가는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척도에 오류를 일으키면서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도, 폭로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임을 드러낸다. 세계를 인식하는 우리의 방식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발견했다면, 엉키고 충돌하는 세계를 흡수한 로르 프루보와 마주할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