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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주 변호사 Jul 01. 2024

나는 너에게는 늘 주고, 다른 이에게는 늘 받기만 한다

양보의 걍요, 


사람과의 관계는 늘 평등하지 않다. 어쩌면 끊임없이 움직이는 시소와 같이 어딘가 한 쪽이 희생하거나 희생당하기 마련이다.  


내가 한 번 밥을 사면 다음에 상대가 밥을 사는 것이 이치에 맞겠지만 처음 밥을 산 사람이 여전히 (또는 대체적으로) 사기 마련이다. 마음의 균형 또한 마찬가지여서 내가 어떤 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늘 그의 이야기를 듣느라 계속 내가 할 이야기들을 놓치게 된다. 내가 사랑을 주는 관계는 상대에게 받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여간해서는 상황이 역전되지 않는다. 


나는 너에게는 늘 주고, 또 다른 이에게는 늘 받기만 한다. 


그렇다. 인간관계는 시소와 같이 균형을 맞추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이러한 불균형, 관계들이 반복되면서 사람과의 기대, 실망, 좌절감이 느껴지는 지점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를 어려워하고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을 점차 어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편한 사람에게는 (어쩌다 보니 늘) 편하게, 어려운 사람에게는 어렵게 대하는 것이 당연해지고 심지어는 어느 순간 사소할 정도의 예의조차 잊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는 늘 어렵고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에 대한 고민을 항상 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어디까지 양보해야 할까? 


이런 마음이 든다면 우선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 양보 '는 사실 양보가 아니며, 어쩌면 지나치게 나의 관점일 수도 있다. 


상담을 하다 보면 느끼는 것들이 있다. 어떤 이는 이미 넘칠 정도로 상대에게 양보를 하는 삶을 살아왔음에도 그것을 잘 모른다. 상대에게 원하는 최소한의 것들을 이야기했을 때 상대가 (언제나 그렇듯이) 패악질을 부리면 바로 양보를 하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양보하는 자는 자신이 양보를 한다는 것에 대한 진정한 자각을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 저 사람은 원래 저래,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야. '라며 상대를 이해하려는 모습까지 보인다. 


한편, 양보를 강요하는 자들의 모습은 어떠할까? 


' 내가 양보한다.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자체로, 어쩌면 자신이 지금까지 많은 것을 받아왔던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원래 양보를 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 양보를 한다. '라는 것이 큰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타인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미 ' 양보한다. '라는 개념이 많지 않다. 그들에게는 내가 받은 만큼의 갚음, 또는 당연히 할 수 있는 배려와 같은 다른 감정들이 앞선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왔기에, 어떤 이들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 양보한다. '가 되어버리는 모습들을 많이 본다. 


안타깝게도, 물론 그들은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어쩌면 상황이 바뀌더라도 ) 이 사실을 결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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