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법률사무소 봄에서는 소속 변호사님들의 퇴사와 신규 변호사님들의 영입으로 인한 전반적인 재정비가 있었다. 봄 사무실에 벌써 많은 변호사님들이 스쳐갔다. 그러고 보니 법률사무소 봄이 만들어진지도 2년 반이 지나고 있다.
22년의 겨울, 아무것도 없었던 정행 빌딩에서 두 번째로 들어간 사무실인 법률사무소 봄은, 나에게는 처음으로 분양받았던 나의 재산이자 나만의 오롯한 공간이었다. 그때는 건물 전체에 사람이 없어 뼈가 시리도록 추웠는데도 매일같이 아무것도 없는 사무실을 보러 남양주로 향했다.
그때를 떠올려보면 이미 나의 공간과 삶은 많이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그전까지 '나의 공간'이라는 것이 없었고 개업을 하기 전까지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해 본 적이 없다. 20대의 대부분은 여행과 공부로 시간을 보냈고 30대에 잠깐 사법연수원 시절을 거쳐 또다시 집에서 공부를 하는 시간들을 보냈다. 단체 생활을 해야만 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은 늘 우울했다. 사법연수원에서도 그 수많은 모임들, 동호회들 모임에 자주 나가지 않아 나를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늘 사람들이 많은 곳을 피해 너울너울 방황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나는 타인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이 궁금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가? 생각하면 그렇지는 않다. 내가 관심이 가는 것은 오로지 나와 대화가 통하는 가치관이 맞는 사람으로, 진실한 인간관계가 아니라면 다른 인간관계는 나에게 필요치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나는 진심을 다하는 관계를 원한다. 소통이 있는 관계, 진심으로 타인을 걱정할 수 있는 만남.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맺고 또 그래야만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동창 모임에 나가서 타인의 이야기들을 듣는다. 내용의 대부분은 지금 이 시점에 잘나가는 사람, 돈과 명예, 겉으로 보이는 이야기들이다. 나의 가치관, 행복이나 꿈과 관련된 이야기는 당연히 배제된다. 그런 이야기들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 불편한 자리임에도 타인에게 맞춘다. 실은 불행한 삶을 살고 있더라도 겉으로 보이는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
타(他)에 집중되어 있는 삶은 당연하지만 나를 잃게 한다. 왜 우리는 끊임없이 남의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리고 그들에게 보이는 행복의 기준에 맞춰야 할까? 한국에서의 삶은 타(他)로 가득한 곳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 마음에 드는,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필요해 보이는 인간관계를 한다. 심지어 많은 이들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나의 행복이 무엇인지도.
어쩌면 너무 많은 시간들을 타인의 기대와 비교가 익숙한 곳에서 보냈기 때문에 혼자로 있는 것이 힘들게 여겨져서가 아닐까 싶다. 오롯이 혼자 있는 것이 자신이 없거나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다.
나는 생각한다.
여전히 진심을 다하는 관계가 아니라면, '나'에게 집중될 수 있는 만남이 아니라면 하지 않는 것이 맞다고. 어설픈 만남은 내 눈을 흐리게만 하고 마음만 어지럽힌다. 진심이 없는 관계는 더 나아가서 나를 손상시키기도 한다.
사금(沙金)과 같은 인간관계.
한때 나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것은 나의 시선이 진실된 것이 아닌 다른 것에 치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한하고 짧았던 한때를 진심으로 다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