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얼마나 이곳에 앉아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 나는 그야말로 갑자기 잠에서 깬 것과 같은 상태였으니까. 내가 앉아 있었던 그곳은 그리 좁지도 않고 넓지도 않았지만 머리끝으로 보이는 둥근 하늘의 거리로 미뤄볼 때 상당히 깊이가 있는 곳은 분명했어.
어쩐 이유에선지 현실적인 공간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그곳에 있는 내가 낯설지 않았어. 두렵지도 않았지. 마치 언젠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란 것처럼 그 우물은 나에게 친숙한 느낌이었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원래 혼자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잖아. 낯선 곳에 가는 것은 더더욱 그렇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곳은 고향처럼 안락한 느낌이 들었어.
웅크리고 있던 나는 어둠이 내 눈에 익숙해져 갈 때쯤 주위를 둘러보았지. 그리고 용기를 내서 오른손을 뻗어 우물 벽에 손을 대 보았어. 어둠이 내려앉은 가운데 내 손으로 느껴지는 축축하고 서늘한 느낌이 이내 내 손으로 느껴졌지. 뼈를 찌르는 듯한 한기는 내 손바닥으로부터 시작하여 내 몸까지 타고 올라왔어. 정말로 견딜 수 없는 차가운 느낌이었어. 나는 바로 손을 떼어버리고 주위를 둘러보다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어.
하늘 위에는 아주 얇고 예쁜 초승달이 떠 있었어. 우물 밑바닥에 앉아 있었던 탓에 하늘은 둥글게 잘려 보였는데 그 은빛의 달은 동그라미 하늘 속에 혼자 완연히 빛을 내고 있었어. 주위를 뒤덮은 어둠 때문일까, 그 빛은 도드라지는 듯 그 주변의 어둠을 잡아먹고 오롯이 도도하게 떠있었어. 나는 어떤 무엇엔가 홀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달을 쳐다보았지. 빛은 단 하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것에 의존하는 것처럼. 문득 신기하게도 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 아무런 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웠어. 나는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뺨을 때려보았는데 확실한 아픔이 느껴졌어. 나는 본능적으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지. 어쩌면 이 차가운 물속에 해골 같은 것이 떠다니고 있을지도 몰라. 또 내가 견딜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앉아 있는 내 상반신의 삼분의 일만큼 차오른 물은 깨끗했고 그 안에는 적어도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보였어. 물의 온도는 우물의 벽처럼 그렇게 춥지 않았어. 밤이었지만 벽에 굳이 손을 대지 않는다면 이곳이 그렇게까지 춥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 오히려 조금 따뜻한 느낌마저 들었달까. 나는 그냥 그곳에 앉아 있어야만 했던 거야.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던 것처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 우물 속에서 나는 죽게 되는 것일까? 당연한 수순처럼 그런 생각을 해 보았어.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려니 지금까지의 나의 인생이 뒤죽박죽으로 느껴졌어. 그것들은 영화처럼 어느 순간 화면이 되어 떠올랐고 과거를 재생하는 테이프처럼 빠르게 생겨났다가 사라져 갔어. 나는 그 와중에 누군가가 나를 찾지 않고 또 이곳에서 생과 완전한 작별을 고하게 되더라도 결국 어쩔 수 없이 당연한 삶의 수순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어.
그렇게 나는 어떤 허기짐도 결핍도 없이, 어쩌면 조금 평온함마저 느끼며 누워있기도 하고 앉아 있기도 했지.
그렇게 많은 시간들이 지났어. 나는 분명히 실제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또 어떤 생리적인 욕구도 없이 그 우물에 앉아 있을 수 있었지. 그 검은 강의 바다는 분명히 나의 시간과 공간 개념을 점차 흐릿하게 만들어서 실제로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지는 알 수 없었어. 어느 순간 나는 지금 이 상황도 그럭저럭 괜찮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어. 다만 이렇게까지 혼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 말 그대로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말이야.
어느 순간 나는 그토록 염원하던 깊은 잠에 한없이 빠져들게 되었지. 죽음과도 같은 침묵, 고요한 바닷속에 깊게 잠겨 들어가는 끝이 없는 고독, 더 이상 그런 감정들은 나를 괴롭힐 수 없었어. 나는 침묵에 잠겼고 모든 현상은 그저 나를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했어.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알게 된 것은 내가 사실 우물에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인생의 많은 지점이 완전히 변해버렸다는 사실이야.
오랜 시간 뒤 그녀는 말했다. 우물 속의 일들에 관하여. 그때의 그녀는 무척 침착한 눈으로 바깥을 응시했다. 그 눈빛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고 그대로 그 자리에 박제가 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가 그다음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 그런데 한참 뒤에 이상한 일이 일어난 거야. '
그녀는 메마른 어조로 말했다.
누군가가 내가 머물고 있던 우물로 다가왔어. 그것은 분명히 일어난 일이었지.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곳은 오롯한 나 혼자만의 세계였는데 말이야. 말하자면 완전히 독창적인 나만의 세계, 그곳은 그런 곳이었어. 그 우물은 나의 것이었고 또 나를 위해 설계된 곳이었어.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이 우물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또는 그 이후부터라고 할까. 이곳은 밤으로만 존재한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예쁜 초승달이 떠 있는 고독한 세계.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조차 이곳으로 어떻게 흘러들어왔는지 알지 못한다. 어찌 되었든 아무리 봐도 타인과 결부가 될 수 있는 지점은 없었어. 그래서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고 이내 잠잠히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일지도 몰라.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우물에 누군가, 분명한 타인이 왔어. 그 동그란 우물의 위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던 거야. 그 사람은... 이름이 없는 그 사람은... 그래 화이트로 명명(命名)하자. 화이트는 나를 만나기 위해 왔다고 했어. 나를 만나기 위해 아주 먼 곳에서부터 왔다고.
화이트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화이트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먼 나라에서부터 몇 날 며칠을 꼬박 달려왔다. 그들은 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적어도 화이트에게는 그의 보잘것없는 삶을 통틀어 가장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야 했고 그 사람에게 자신의 진심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것은 생존하는 것이라면 아주 당연한 기본적인 욕구이기도 했다. 화이트는 자신의 삶에서 만날 수 있는 운명적인 사람이(그의 삶에서 만날 수 있는 운명적인 인물은 오로지 한 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화이트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라는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내가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었겠어? 화이트는 그녀에게 말했다. 어떻게 이곳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었겠어. 나는 오로지 당신을 만나러 왔어.
그녀는 화이트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굉장히 오래간만에 나눈 사람(실존하는 사람인지까지는 확인하기 어려웠지만)과의 대화였다. 화이트는 우물 바닥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주로 바깥세상에 관한 이야기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화이트가 그 우물 위에서 시간이 될 때마다 그녀 옆에 머무르면서 말을 걸어주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물론 화이트가 그 위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밥을 먹고는 있는 것인지 어쩌면 특수한 문으로 우물과 바깥세계로 통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 그 세계를 왔다 갔다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우물 속에 상당히 오래 앉아 있었고 시간 개념은 점차 흐릿해져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이트는 그녀가 부를 때면 언제든 충실한 집사처럼 나타났다. 그는 언제나 우물 위로 보이는 동그란 하늘에 작게 인기척을 내고, 그녀가 원하는 때에 나타났다.
'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 '
어느 날 화이트가 물었다.
' 꽤 오래 있었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말이야. '
그 질문에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가?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왜 그런 원초적이고 당연한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녀는 그저 우물에 빠져 있는 스스로를 알게 되었고, 이 상황을 벗어날 생각보다는 오히려 안온함으로 젖어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잘 모르겠어. 내가 나가고 싶은지 말이야.. '
그래서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 생각해 보니 이곳으로 와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어. 나는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을 뿐이야. 이봐, 화이트. 이 공간은 사실 나를 위해 설계된 곳이란 말이야.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꽤 안온한 느낌이 들어. 어쩌면 나는 바깥에서 생각보다 많이 지쳐버렸는지도 몰라. 사실 나는 끼니때마다 밥을 챙겨 먹는 것도 귀찮았어. 또 많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나를 찾아와서 내 빛을 가져가버리곤 했어. 하나도 빠짐없이 말이야. 그들은 내 빛을 착실하게 가져가고, 자기들 나름대로 보답을 했지. 어떤 이는 그냥 도망을 가기도 했고, 어떤 이는 자신의 것을 내어주기도 했어. 나름대로는 고마움의 표시로. 하지만 어떤 이들은 내가 도움을 주었는데도 오히려 나를 칼로 찌르기도 해. '
화이트는 언제나 그렇듯이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 그런 세상에서 나는 이제 막 도망쳐 온 셈이야. 사실로 말하자면 나는 자신이 없는 것인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조금 더 근원적으로 사람에게 질려버린 것일까? 정말로 사랑이라는 것이 있기는 할까? 나는 언제나 문제를 만들었어. 나는 타인에게 영감을 주고 그것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사라졌지. '
' 누구나 그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감당하지 못할 일들을 벌이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지. 그것을 제대로 보기 어려워. '
' 나는, 이곳에서 나가야 할까? '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뇌듯이 물었다. 사실 그녀가 우물로 나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화이트가 떠나고 한참 뒤의 일이다. 화이트는 그녀가 이곳으로 나갈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알려주었다.
' 마음을 먹으면 돼. 당신이 말했듯이 이곳은 당신을 위해 설계된 곳이니까. 당신이 마음을 먹으면 바로 나갈 수 있어. 하지만 그전까지는 얼마든지 이곳에 있어도 괜찮아. 당신이 괜찮아질 때까지. 다만 한 가지는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시간은 누구에게나 유한하게 흐르지. 이곳은 시간의 개념이 없는 곳이지만 그래도 바깥 세계에서의 시간은 매우 착실하게 흘러가고 있어.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는 많지 않아. 생은 순식간에 끝날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온 가장 소중하고 특별한 것들을 간직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거야.
나에게 가장 소중하고 특별한 것을 알 수 있으려면 그만큼 내가 깨어있지 않으면 안 돼. '
화이트는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그는 결국 그녀를 우물 밖으로 나오게 만드는 것에는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진심을 다해 그녀 옆에 있으면서 오랜 기간을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알았던 것이다. 아직까지는 그녀의 때가 오지 않았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