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현주 변호사 Jul 09. 2023

첫사랑, 그녀(11)

그녀는 나에게 어디까지 함께 갈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그해 여름, 산기슭의 티베트 사원들이 위치한 인도 다람살라의 작은 마을에서 머물기로 한다. 그곳은 달라이 라마가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중국 정부를 피해 망명해 온 임시 피난처와 같은 곳으로, 그녀 외에는 외국인이 거의 없기도 했고 생각보다 체류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았다. 새벽녘이 되면 티베트의 승려들이 신실하게 일어나 그야말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니차를 돌리며 '옴마니 반데흠*'을 읇조리면서 하루를 시작했지만 그 당시의 그녀에게는 그조차 마음의 안식이 되었다.


그녀는 그때까지 종교가 딱히 없었다. 불교도 천주교도 기독교도 그녀에게는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못하면 견딜 수 없이 나약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그녀에게는 불교의 불상이나 천주교의 마리아상이나 팔다리에 못이 박혀 피를 흘리며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예수의 십자가도 큰 차이가 없게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당시 그녀가 한국을 떠나 외국, 그것도 인도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나는 jazz bar의 그날 밤 이후 그녀의 연락을 매일 기다렸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만나는 방식은 그녀가 일방적으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 ' 뭐 해? '라고 물어보거나, '만나자.'라는 제안을 하여 갑자기 이루어졌다. 내 쪽에서 그녀에게 먼저 연락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것이 그녀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날 밤 이후로 한 동안 ㅡ 그녀의 연락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 수 일지나고,  나는 이 한 동안 ㅡ 이 생각보다 길게 지속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를 지나치게 생각하다 보면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더라도 상대의 마음의 미세한 변화도 어느 정도는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그녀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했다. 전화는 1분 정도 끈질기게 울리다가 늘 자동응답기의 안내 멘트로 넘어갔다. 다행히 그녀는 나를 의식적으로 거절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벨 소리 너머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문득 그녀가 어디론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jazz bar의 일은 생각할수록 현실성을 잃어갔다. 마치 나의 망상이나 꿈에서 그녀와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쩌면 그녀는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나에게 연락을 했던 것일까?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물론 알고 있지만, 나는 매일 같이 학교를 드나들면서 그녀의 흔적을 찾았다. 그녀와 함께 갔던 카페, 학관, 운동장을 거슬러 그녀와 종종 앉았던 벤치에 앉아 있기도 했다. 나는 문득 극심한 외로움을 느꼈다. 지금껏 혼자 있으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격렬한 외로움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도착한 그녀의 편지를 받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정말로 이곳에 없다는 것을.


우습게도 처음 그녀의 편지를 받고 난 이후 내가 느꼈던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날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나를 사랑한다고까지 말했다(나에게는 적어도 그와 같은 뉘앙스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가 언제 (한국에) 돌아올지, 돌아오더라도 나에게 다시 연락을 할지는 현재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편지는 무척 다정한 느낌이 있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방금 만든 음식을 포장해 온 것처럼 그것을 만든 사람의 진심 어린 온기가 느껴졌지만ㅡ 바로 꺼내서 답을 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의미가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무엇인가를 결정하기 이전에 그녀는 이미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세심하게 배려했으며 나 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고려했다. 나는 편지를 몇 번이고 읽으면서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편지를 읽고, 내가 당장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그 날 밤, 나는 집으로 조금 일찍 들어갔다. 아직 해가 지지 않는 오후다. 문을 열고 이젤을 둔 방을 가로질러 들어가 늘 그렇듯이 뉴스를 틀어놓고 커튼을 모두 닫았다. 나는 문득 오래간만에 강한 허기를 느꼈다. 위가 타오를 정도로 격렬한 공복감이었다. 나는 냉장고에 있던 맥주를 꺼내 마시면서 냄비에 물을 끓이고 냉동실에 얼려 있는 아스파라거스를 살짝 데쳤다. 그리고 창고에 남아 있던 페투치니 면을 10분 정도 고 베이컨과 마늘을 썰어 올리브 오일에 볶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음식을 잘 찾아먹는 스타일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 처음에는 주로 전자레인지에 넣고 덮이기만 하면 완성되는 레토르트 식품을 위주로 먹었다. 물론 배달음식을 시켜 먹기도 했다. 하지만 배달 음식이나 레토르트 음식은 대부분 느끼하고 종류가 한정되어 있어 바로 질려버렸다. 그 이후 나는 간단히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거창한 요리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재료를 고르고 음식을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가 있었다. 어차피 나 혼자 어느 정도의 배를 채울 만큼의 음식을 만드는 일인 것이다.


요리는 일단 익숙해지자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마트에 가서 토마토, 파프리카, 감자, 양파, 아스파라거스 같은 신선한 야채들을 담고, 몸에 좋은 올리브 오일이나 아보카도 오일을 사 둔다. 그것이 사실상 전부였다. 대부분의 경우 제철에 나는 채소, 생선, 좋은 고기를 사면 간은 소금, 후추면 충분했다.


나는 냉장고에서 두 번째 맥주를 꺼내 완성된 아스파라거스를 넣은 스파게티를 정신없이 먹었다. 그렇지만 공복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느끼는 공복감은 아마도 어딘가 다른 곳에서 온 종류의 것인 것 같았다. 나는 얼음을 몇 개 넣은 잔에 위스키를 가득 담고 의자에 앉아, 커튼을 열었다. 해는 아직 지지 않았지만 마침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가 지고 난 이후 찾아오는 밤인지, 비구름인지 알 수 없는 캄캄한 어둠이 고맙게도 내가 있는 공간으로 찾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편지를 다시 꺼내 읽었다. '하준아.'로 시작되는 첫 문장을 보자,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으며 jazz bar에서 왔던 그날 밤의 일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이미 수백 번은 족히 넘을 정도로 떠올렸던 일이다.


그녀가 떠난 이후, 나는 왜 그녀가 나를 떠났는지(혹은 떠나야만 했는지) 계속 생각했다. 그녀가 나에게 원한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그녀에게 실망을 주었던 것일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어렴풋이, 그날 밤의 일은 그녀와 나의 삶에서 반드시 일어났어야 할 당연한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 같은 것이다. 살다 보면 그런 순간들이 있다. 그 관문을 통과한 이후의 것들은 그 이후에 생각하더라도 말이다.


그녀는 새벽녘에 나를 바라보면서 ' 나를 얼마나 사랑해? '라고 물었었다. 그때의 그녀의 눈은 흔들림이 없는 지평선을 떠올리게 했다. 그 눈은 바다였다. 하지만 무척 고요했으며 어떤 일렁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그려놓은 그림과 같이.


하지만 나는 그녀가 이미 그려놓은 바다 안에, 그녀 역시 그림처럼 굳어져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그곳에서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나의 손을 잡고, 나의 마음을 물었다. 내가 어디까지 그녀와 함께 갈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나에게 어디까지 함께 갈 수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나에게 바라고 있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씩 알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늘이 뚫린 듯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땅에 마찰되어 떨어지는 빗물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멀리에서 ㅡ 다시 한번 자신의 존재를 알려온 것이다.


나는 그다음 날, 휴학계를 내고 바로 인도로 가는 비행기표를 결제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첫사랑, 그녀(1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