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떠난 이유,
지금까지의 나의 인생을 반추해 보면 나는 내가 갑자기 나이를 먹었다는 기분이 든다. 한편으로는 삶을 살아오면서 답답했던 시기도 있었다. 내가 생각해 왔던 것이 잘 풀리지 않았던 시기 같은 것이다. 나는 그해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시장에 갔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린 남매를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을 사셨다. 내 어린 시절의 어머니의 모습은 늘 고단하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사랑은 겨우 숨을 틔우는 화초의 마지막 숨처럼 살아있었다. 나에게는 가장 필요한 종류의 것이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시장의 시끌시끌하고 복잡한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열정적인 삶의 모습들은 어지러웠던 내 마음을 조금 평온하게 했다. 나는 빛나는 밤 시장의 여러 광경들을 열심히 담아두었다.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어머니는 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나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큰 아버지는 화가였다. 나름 잘 나갔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였지만 상당히 젊은 나이에 죽었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묻지 않았다. 나에게 큰 아버지는 내 몸체만 한 이젤을 앞에 두고 가만히 앉아 있었던 모습들의 몇 장면으로 기억된다. 돌이켜 보면 스냅사진과 같이 ㅡ 하지만, 큰 아버지는 우리 집안에서는 그래도 유일하게 잘 나갔던 사람으로 기억되었던 모양이고,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나는 미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수능을 보기 전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미대에 진학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큰 아버지가 죽고, 내가 그림에 재능을 보이면서부터 그것은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는, 당연히 결정된 듯한 삶을 살아왔다. 결정된 듯한 삶은 물론 나의 상황과 의견을 친절하게 묻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나의 의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너무나도 수동적인 태도로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내가 답답했던 것들조차도 어쩌면 내가 진정으로 답답했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대학을 들어가고 난 이후 제일 처음 그녀를 만났다. 처음에 만났던 그녀는 나와 달리 ㅡ 매여있는 것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저렇게 혼자서 용감하게 살아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자유로웠다. 나는 지금껏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나에게 손을 내밀어, 자신이 머무는 세계로 나를 초대했던 것이다.
나는 물론 망설였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나를 둘러싼 이 견고한 세계에서 지금까지와 같이 타인의 기대와, 또 그로 인한 삶의 만족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안녕, 하준아.
오늘은 뼈가 시릴정도로 추운 날이었어. 나는 흰 눈이 펑펑 오는 도로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신경을 집중하면서 길을 걸었어. 이곳은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하늘이 뚫린 듯이 눈이 쏟아져내려. 나는 2층 다락방에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들을 보고 있어.
오늘은 나의 룸메이트와 함께 눈을 바라보면서 핫초코를 꺼내 마셨어. 핫초코 ㅡ가 이렇게 맛있다는 것은 최근에 알게 되었어. 우리는 코코아가루를 컵에 가득 담고 우유를 뜨겁게 끓인 다음 천천히 부어. 그리고 수저를 넣고 천천히 원을 그리면서 코코아가루가 잘 녹아들 수 있도록 한참을 젓지. 그렇게 기포가 올라올 때까지 한 참을 젓다가 코코아가루가 전부 다 녹았다는 확신이 들면, 눈을 보면서 천천히 핫초코를 마셔. 눈이 오는 날, 이렇게 달달한 차를 마시는 것은 정말로 행복한 기분이 들어.
너는 잘 지내고 있겠지?
오늘은 너에게 꼭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아마도 너는 내가 왜 너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났는지 궁금해했을 테니까 말이야. 나는 나의 언어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 미안해. 너도 알다시피 나는 친절한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너라면 내가 하는 말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나는 너를 만나 정말로 깊은 위안을 얻었어. 사람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서로 그 공간을 함께 나누며 위안을 얻는 것만큼 소중한 것이 있을까? 아마도 그렇게 반짝이는 시간은 없겠지. 나는 네가 오래도록 지쳐있다는 것을 알았고, 나 또한 그렇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어.
우리는 물론 완전히 다른 곳에서 출발했지만 ㅡ 같은 지점에 함께 머물러 있었어. 그것이 어쩌면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말이야.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 불꽃같은 찰나의 시간들을 보듬어 평생을 살아나가는 밑거름으로 만들기도 해. 그만큼 쉽지 않고, 소중한 것이니까 말이야.
물론 나는 너와 함께 있는 순간들을 꿈꾸었어. 네가 나와 함께 떠난다면 어떨까? 내가 가려는 길에 네가 함께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들을 잠시 하기도 했어.
하지만 너는 네가 가야 할 길과, 또 너의 삶이 있었지.
나는 너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어. 그것이 네가 선택한 삶의 모습이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나는 떠날 수밖에 없었어. 나의 떠남, 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다만 그 시기의 문제였지. 나는 잠시 너의 곁에 머물렀고 ㅡ 나는 너의 선택을 기다렸던 거야.
하준아, 이제 조금 이해가 되었겠지?
너는, 네가 원하는 모습대로 지금까지처럼 잘 살아나갈 수 있을 거야. 아마도 너는 너를 둘러싼 사람들과 가족들을 생각보다 많이 사랑하고 있을 거야. 나는 잠시 스쳐가는 위성*에 불과해.
나는 그 사실이 잠시 슬펐지만, 이내 받아들이게 되었어. 지금까지와 다름없이 말이야.
어쩌면 나는 정말로 ㅡ 위성*으로 태어났을지도 모르지, 아마 나는 다른 곳에서 편하게 쉴 수 있을지도 몰라, 뭐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아. 우리의 삶은 빙글빙글 돌고 도니까.
나는 너의 삶에 ㅡ 잠시 머물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
그럼, 편안한 밤이 되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