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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양 Jan 17. 2022

입영영장이 알려준 빛의 존재

[속초 한달살기] D10

미뤄두었던 입영영장이 또다시 나를 찾아주었다. 막상 꽤나 맹목적으로 시간을 흘려보내야 하는 1년 반이라는 시간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나니 석연치 않았던 과거의 의심으로 가득했던 시간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특정 질문에 확실한 답을 내는 것 자체가 이상해 보이는 시점에 나는 모든 것들에 완벽한 답을 내놓기 위해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쳤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묵혀두었던 내 감정들의 존재는 점점 흐릿해져 가고 나중에는 기억에서조차 길을 잃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늘 겪고 싶지 않은 시간으로 향하는 출입문 앞에서 삶의 빛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어찌저찌 입영할 날짜를 미룰 것인지 아니면 그냥 주어진 대로 의무를 행할 것인지를 논하면서 삶의 본질적인 의미까지 얘기하게 되었다. 앞으로 1년을 더 나의 시간으로 사용하고 군대에 가는 것과 최대한 일찍 복무를 마무리하고 사회에서 다시 삶을 시작하는 것 사이의 이득 관계를 따지다 보니 “만약 1년이 내게 주어진다면 나는 무엇을 해낼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원래는 1년 뒤에 군복무를 위해 떠나려고 마음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입영날짜가 나왔다는 이유로 빨리 가는 것을 고려하게 됐는데 이유는 내가 계획한 것들만으로는 1년을 충분히 가치 있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책을 쓰고 단체에 소속되어 1년간 철학과 인문학에 대해서 깊은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주어진 시간들을 온전히 만끽하고 결괏값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도저히 서지 않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빠르게 해야 하는 일을 처리하고 오는 쪽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럼 만약 1년이라는 시간을 더 유예하기로 결정했다면 나는 그 기간 내에 어떤 선택을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까. 우선 새로운 공부를 위해 다른 나라로 떠나는 것, 그리고 그걸 위해 사전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것이 최우선일 것 같다. 지금까지의 과거를 되짚어보니 나는 정말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했지만 정작 한 곳에서 문화를 깊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경험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기적으로 특정한 경험을 목적으로 한 여행을 다녀온 것 이외에 진정 ‘살았다’라고 말할 만한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내 모국인 한국의 문화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고 움직이면서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평생 내가 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지 않다. 가능성을 직면하고 모두가 무시했던 곳에서 기회를 발견하며 최대한 많은 땅을 밟는 인생을 살아내고 싶다.


아쉽게도 대한민국이 가진 문화는 홀로 독고다이로 살아가기 최적화되어 있지는 않다. 소속감이 강조되고 사회적인 관계망의 중요성이 워낙 부각되는 곳이다 보니 혼자서 아무것도 없는 사막 위에 탑을 쌓고자 노력을 하는 것은 막연하고 기약 없는 싸움처럼 느껴졌다. 더욱이 중국에서 호객행위를 해보기도 하고, 스페인에서 언어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샌드위치를 팔아보면서 다이나믹한 경험들을 한 후였기 때문에 이런 정적이고 지속적인 싸움이 이전보다 큰 불편함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다방면으로 내가 현재 하고 있는 고민들이나 미래에 원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구축하는 데에는 조금 더 개방적인 자유로움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해외에서 생활한 경험들이 뒷받침되어 더욱 강력하게 나에게 자기주장을 펼쳤다. 스페인과 중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두 가지를 느꼈다. 첫 번째, 나는 정말 사업을 하고 싶다. 그리고 두 번째, 나는 정말 경영학을 공부하고 싶지 않다. 해외에서 사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을 가지고 떠났던 곳에서 보낸 나의 삶에 질려 공부하던 걸 그만두고 한국에 들어와 나름의 사업을 하며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내가 왜 사업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 생각해왔는데 오늘 그 답을 다시 상기할 수 있었다. 예술을 하고 싶어서. 맞다. 나는 예술을 하고 싶어서 사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사업을 일궈내기 위해 경영학을 공부하러 해외에 나가게 된 것이다. 예술을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내 삶에 예술은 꽤나 어려운 것으로 자리 잡아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예술이 너무도 하고 싶다.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한 뒤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나는 예술을 다시 공부해야 한다.” 그렇게 느낀 뒤 내가 한국에서 경험하고 있는 모든 일들, 매일같이 홀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방에서 글을 쓰고, 같이 삶을 나눌 친구 한 명 없이 조용하게 그림을 그리는 일들이 나와 전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람과 어울리면서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이다. 생동감이나 얼굴의 미소 따위는 홀로 있을 때보다 누군가와 사력을 다해 시간에 대해 언쟁할 때 나에게 찾아온다. 그런 내가 몇 달 동안 외톨이처럼 작업하려고 했으니 몸이 배길 만도 하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차곡차곡 연말부터 쌓여온 내적 근심들이 마침 군대라는 문제에 부딪히면서 밖으로 터지게 된 것이다. 동시에 게스트하우스에서의 생활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아직 이 주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이곳에서 정말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며 많은 걸 느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크게 실감한 사실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스텝을 하면서 사는 삶이 정말 여유롭다는 것이다. 크게 바뀌거나 변하는 일 없이 맡은 바 책임만 다하면 언제나 잔잔한 그런 삶. 먹고사는 데에 큰 지장도 없이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를 얻어 안정감과 나름의 다양성도 보장이 되니 이렇게 몇 달을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목 뒤에 소름이 끼쳤다. 이는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이 그 삶을 고민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곳을 돌아다니며 만나지 못한 사람들과 겪어보지 못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확신했는데 이런 자그마한 안정감에도 송두리째 휘둘릴 수 있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다시금 절벽으로 내모는 느낌이었다. 아마 이곳에서의 생활을 해보지 못했다면 느끼지 못했을 감정이라 사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모든 시간들이 너무 뼈아프지만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는 이렇게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들을 도전하면서 나는 조금씩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윤곽을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모든 결론들 앞에 자유로움이 보장된 삶에서 정말 생존을 위해 싸워보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 생각이 들고 나니 군대를 지금 가고 나중에 가고는 무의미해졌다. 결국 삶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싸움이고 그 싸움의 승리는 온전히 내 의지에 달려있다.


하여튼,  두서없는 글의 맺음말은 “나는 다시 예술을  거다라는 것이다. 어떻게나 어디서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내가 원했던 것들 분명하게 겪어보는 곳으로 떠날 거라는 사실 만은 확실하다.




인스타그램: xyz_livelifeweir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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