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한 부모님 덕분에 어린 시절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게 인스턴트 식품을 먹어 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식품 첨가제의 유해성이 한참 알려지던 시기라, 가급적 집밥을 먹게 하셨고, 도시락 반찬도 참치 통조림이나 줄줄이 비엔나가 아닌, 깻잎, 오이 소박이, 볶은 멸치 등이었다. 라면도 못 먹게 하셨는데, 도저히 먹고 싶은 것을 참을 수 없어서 부모님 몰래 가끔씩 사 먹곤 하였다.
3분 카레, 3분 짜장, 컵라면, 라면 등등, 어린 마음에 나는 이런 것들을 마음껏 먹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친구 집에 놀러가서 라면이 박스채로 있는데 마음대로 꺼내서 생으로 부숴서 먹기도 하고, 끓여 먹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집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충격을 받았다. 어릴 때 부모님께서 개인 사업을 하셔서, 우리집에서 같이 점심식사를 하는 인원이 8명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카레라이스였는데, 큰 솥으로 가득 카레를 만들어도, 8명이 먹기에는 약간 부족하였다. 카레가 항상 밥을 비비기엔 조금 부족했는데, 이때의 서운한 마음이 아직 남아서인지 나는 요즘 카레 라이스를 먹을 때, 밥에 비해서 항상 카레를 가득, 많이 퍼서 먹곤 한다.
드물게 인스턴트 식품을 먹다 보니,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라면들 맛을 다 알게 되었다. 계란도 넣어보고, 참치 통조림이나 햄등 기타 토핑을 겉들이며, 먹어보는 라면은 정말로 맛있었다. 20대 초반이면 친구들은 다들 라면은 지겹게 먹어봤을 나이라 이걸 아주 즐겁게 먹는 나를 이상하게 여기곤 하였다.
이렇게 인스턴트 식품을 좋아하였는데, 군대를 다녀온 이후로는 우리는 다소 거리를 두게 되었다. 군대에 맛없는 정부미로 증기로 쪄서 주는 밥에 질린 나에게 집밥을 먹는 것이 큰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전기밥솥에서 나온 햇쌀밥은 군대에 있을 때 느꼈던, 강압적이고, 자유롭지 못했던 내 영혼을 치유해 주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원룸에서 혼자 살게 되었을 때, 나는 다시 인스턴트 식품을 찾았다. 회사 밥도 맛있었지만, 퇴근 후 내가 선택해서 먹을 수 있는 저녁 한 끼가 나에겐 소중했었다. 신입사원 시절이라 회사에서 그저 시키는 대로만 열심히 하고도 욕 먹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선택해서 간편하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그 한 끼가 그 날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신속, 정확하게, 그리고 실수 없이, 완벽히 한 유일한 일인 경우가 많았다. 라면에 즉석밥, 냉동 식품을 먹으면서, 서러워서 운 날도 있었다.
일년 정도만 하자고 생각했던 원룸 생활이 몇 년이 되고 나서야 결혼을 하게 되어, 다시 집밥과 친구가 되고, 인스턴트 식품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결혼은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정말로 내 시간이 많았다. 일주일에 하루만 쉬어도 하루 종일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다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다 만났었는데, 결혼 후에는 그런 개인 자유시간이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다. 와이프와 조율해서 같이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내 자유시간 같지도 않고, 또한 가사노동이나, 집안 행사도 많아서 실제 내 시간이 많이 줄어 들었다. 경제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전에는 내가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다 사고도, 여유가 있었는데, 결혼 후에는 항상 돈 걱정을 하게 되었다. 물론 시간과 돈 모두,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는 더 확 줄어버렸다.
결혼 전에는 휴일이면 내가 보고 싶은 드라마를 하루 종일 볼 수 있었고, 결혼 후에는 영화관에 가서 와이프가 좋아하는 영화 한 편, 내가 좋아하는 영화 한 편 이렇게 연달아 두 편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나니, 영화나 드라마는 고사하고, 아이들 프로그램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어릴 때는 본방을 보거나 재방송도 한 번 정도만 방송을 해 줘서, 정해진 시간에만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인스턴트 식품처럼 간편하게 검색해서 볼 수 있으니 세상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이렇게 여유가 없어도 인스턴트 식품을 멀리하였는데, 아이들에게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먹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 아이들이 먹을 만한 인스턴트 식품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일년에 두 세번 몇 주 정도 해외출장을 가는데, 이 기간만큼은 또 인스턴트 식품과 친해지는 기간이다. 바쁜 출장 일정 속에서 퇴근 후 호텔에서 제대로 저녁을 챙겨 먹기 어려워서, 나는 매번 라면, 즉석밥, 3분 카레 등등을 가득 가지고 간다. 호텔이나 호텔 주변에서 사 먹으면 비싸기도 하고, 동료들과 시간이 맞지 않아, 혼자 식사를 하게 될 경우, 먼 이국에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곤 해서, 혼자서 호텔방에서 식사를 할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다.
호텔방에서 혼자 느긋하게 인스턴트 식품을 먹고 있으면, 어릴 적 부모님 몰래 라면을 끓여 먹고, 라면 봉지를 제대로 버리지 않아 결국 들켜서 혼이 난 일, 원룸에서 싱크대 찬장 가득 인스턴트 식품들을 쌓아 놓고, 마치 부자가 된 기분으로 오늘은 뭘 먹을까 하고, 짧은 고민을 하던 소소한 행복, 이런 지나간 일들이 떠 올라서 자꾸만 옛 친구나 부모님이 그리워져서 비싼 통화료 내고 전화를 하게 된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인스턴트 식품과 나는 지루한 밀당을 하게 될 것 같다. 지겹고, 싫어서 멀어져 갔는데, 다시 그리워서 만나게 되고, 다시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이런 과정을 계속 겪으며, 끝없이 재미있는 추억을 쌓게 될 것이다. 라면 봉지를 뜯을 때, 통조림 뚜껑을 딸 때, 별다를 게 없는 간단한 일이지만, 과자 봉지를 뜯거나 음료수 캔을 딸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기쁨이 있다. 아마도 바쁘고, 힘든 순간 최소의 노력으로 최선의 한끼를 제공받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을 살아보니, 지름길로 달려갈 때도 있고, 먼 길을 둘러서 갈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길이 아니라 내가 어떤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오늘 또는 내일, 인스턴트 식품을 먹던, 집밥을 먹던, 항상 행복한 한 끼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