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란 거북이 May 10. 2021

엉망진창 첫 해외출장

 2005년 입사 후 신입사원 시절, 나는 정말로 해외출장을 고대하고 있었다. 멋 모르던 대학생 시절, 막연히 회사원들을 보면서 부러웠던 것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해외출장이었다. 회사에서 경비 부담을 다 해 주면서, 해외에 내보내는 만큼, 아주 중요하고, 멋진 일이며, 외국인들을 상대로 뭔가 업무를 한다는 것은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만이 하는 것이라는 정말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 않은 엉뚱한 나만의 잣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 출장 중이었는데, 갑자기 같은 부서 선배에게 전화가 와서는 여권이 있는지 물어봐서,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더니, 바로 부서장님이 전화를 바꿔 받더니, 하던 일 중지하고, 복귀해서 내일 첫 비행기로 홍콩 출장을 가라고 하셨다. 입사한 지 정말 얼마 안 된 시기라, 해외에서 쓸 수 있는 신용카드도 딱 한 장 밖에 없었고, 당연하겠지만, 출장 품의, 비행기표 예약, 하나도 할 줄 몰라서, 선배들이 다 준비해 줘야만 했다.


출장 목적은 아주 간단명료하나, 몸이 힘든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게 된 것이었다. 우리 회사 홍콩 지점에 가서, 홍콩에서 입수한 최신 경쟁사 TV에서 분석이 필요한 부품을 빼서 들고 오면 되는 일이었다.


말은 쉽게 들리지만, 55인치 PDP TV의 가장 전면에 위치한 Filter라는 전면 유리를 빼려면, 나사만도 수백개나 빼내야 한다. 혼자 오만가지 부품을 다 뜯어내는 것도 한나절이 걸리는 일인데, 더 큰 문제는 우리가 필요한 Filter라는 유리가 1.2미터 길이에 70센티 폭이라는 것이다. 홍콩에서 한국까지 이걸 혼자서 핸드캐리로 깨지지 않게, 고이고이 가져오는 건 정말로 엄청나게 힘들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아예, 최대한 안전하고, 덜 고생스럽게 가져오기 위해, 완벽히 준비된 포장박스를 가지고 가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벽에 첫 비행기를 타기 위해 길이 1.5미터, 폭 90센티, 높이 15센티의 박스를 들고, 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해서 수하물 보딩까지 끝내자, 진짜 힘들어서 이미 파김치가 되어 버렸다.


빌어먹을 전동 드라이버도 들고 있었는데, 내 개인물품 가방을 매고, 전동 드라이버는 가방에 넣어 어깨에 걸치고, 포장박스를 두 손으로 꼭 잡고, 종종걸음으로 걷는 내 모습은 정말 부끄러웠다. 최악은 엘리베이터를 탈 때, 이미 타고 있던 사람들이, 나를 보고는 기겁하며, 모두 벽에 붙어서 공간을 내주며, 쑥덕대던 때였다.


홍콩에 도착해서, 고속철을 타고, 겨우 지점에 도착하고는, 바로 빈 회의실에서 혼자 PDP TV를 분해했다. 몇 월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무척이나 더웠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는 내가 바보 같이 느껴졌던 이유는, 우리 회사는 그 당시 복장규제가 좀 엄격했다. 당연히 출장 때는 ‘정장’만 허용이 되었기에, 정장을 입고, 아주 불편하게 분해하고 있는데, 홍콩 지점의 근무자들은 모두 자유로운 복장이었다. 청바지, 운동화 등등.


나만 구두에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안 가르쳐 준 선배들을 속으로 욕했지만, 나는 진짜 오늘 밤을 세워서라도, 반드시 빨리 일을 끝내야 할 이유가 있었다. 1박2일 출장이었기에, 내일은 홍콩의 전자상가에 가서, 내가 쓸 MP3와 디카를 사야만 했다.  


밥도 못 먹고, 저녁 10시쯤 드디어 Filter를 빼내서 고이 포장박스에 담았다. 뿌듯했다. 단 하나 걱정은 이걸 도저히 들고 갈 자신이 없었다. 내가 안스러워 보였는지, 지점 담당자가 그 날 휴가였던 지점장에게 전화를 해서, 특송 화물로 국내로 보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지점장이 나와 통화를 하고 싶다고 해서, 아주 뿌듯한 마음으로, 업무 성과를 말씀드렸더니, 내일 밤 비행기로 가지 말고, 업무 끝났으면, 아침 첫 비행기로 복귀하라고 했다. 너무 억울했다.


새벽부터 밤 10시까지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먼 거리를 날라와서 일 했는데, 빨리 복귀 하라고 하다니, 아무리 내가 신입사원이지만,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못 하겠다고 했고, 왜 못 하겠냐는 질문에, 저도 좀 쉬고 싶다고 대답했다.


결국 다음 날 저녁 비행기로 복귀했고, 디카도 사고, MP3도 샀다. 복귀 후 우리 부서장님께 안 좋은 이야기도 들었다. 지점장이 전화로 신입사원이 출장 와서 놀고 싶다고 한다고, 본사에서 교육 똑바로 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내가 사회생활 경험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쉬고 싶다는 말 대신, 다른 데 들러 경쟁사 제품도 보고, 시장 상황도 조사하고, 등의 다른 합리적인 이유를 말했을 것이다. 말 한 마디 실수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칭찬은 커녕 야단만 맞았다.  



작가의 이전글 인스턴트와 집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