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란 거북이 Nov 28. 2023

The Blue ; 사랑의 색깔

제36회 매일 한글글짓기 경북 공모전 산문 차하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장미꽃 피고, 아카시아 꽃 사이로 벌들이 날아다니는 5월이 되면, 어린 시절 나는 선물 받을 생각에 한껏 들뜨곤 했다. 5월 5일 어린이날, 그리고 5월 8일 내 생일. 달력에 날짜를 하나하나 짚어서 세며, 어떤 선물들을 받게 될 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친구들에게, 부모님에게 선물을 한아름 받고 나면,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어린 아이의 짧은 식견으로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그렇게 수십개의 선물을 받아도, 정말 중요한 선물이 무엇인지 나는 분별하지 못했다. 화려하거나, 비싸거나, 혹은 맛있거나, 지금은 아령칙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는 선물들. 학용품, 과자, 장난감 등, 나는 해변에 만들어 놓은 모래성 같이 금방 기억에서 스러져버릴 이런 선물들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톨스토이의 대표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는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동의한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있고,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에도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파란’, 나는 어릴 때부터 파란색을 좋아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바다 색깔이기 때문이다. 물결 파에 물결 란 (波瀾), 8살 때부터 서예학원을 다니면서 한자를 제법 배웠기에, ‘파란(波瀾)’이라는 바다색의 동음이의어를 알게 되면서, 뭔가 철학적인 깊이 있게 느껴져, 더 한층 파란색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 나를 위해서 외할머니께서는 매년 가을쯤 털실로 파란 스웨터를 직접 만들어 주셨다. 


이 선물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선물이었다. 벗을 때마다 정전기가 일어나서 머리카락이 쭈뼛거리는 것도 싫었고, 보풀이 일어나는 것도 싫었다. 


“새 옷 살 돈이 없어서, 거지같이 저런 옷을 입는데요.”


가없는 친구들의 놀림 때문에,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이 옷을 안 입으려고, 옷 투정도 여러 번 했다. 


“할머니께서, 오랜 시간 공 들여서 만든 건데, 네가 안 입으면, 얼마나 서운하시겠니?”


옷 투정하는 나에게 어머님께서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도대체, 내가 싫어하는 것을 왜 힘들게 만들어서 주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께서는 내 생일, 어린이날,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에는 무척이나 인색하셨다. 선물을 주신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냥 케이크 하나 사 먹으면 되지, 뭘 그렇게 비싼 돈 들여서 선물까지….”


생일, 또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나에게 항상 입버릇처럼 하시던 할머니 말씀이셨다. 

딱 한번, 조르고 졸라서 할머니께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 주신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내가 잘 때, 머리맡에, 초콜렛 하나와 성경책 한 개를 놓아 두셨다. 검은 비닐에 담긴 상태로. 너무 간소하고, 포장도 안 되어있어, 산타의 선물이 아닌 할머니 선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었다. 


세월이 흘러 내 몸이 켜져서, 할머니께서 이제는 스웨터 짜시는 것을 포기하셨을 때, 속으로 무척이나 기뻤다. 드디어 나도 평범한 옷만을 입을 수 있겠구나. 세월은 또 흘러서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이제 나도 어른이 되고,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그 파란 스웨터가 그리워졌다. 할머니 외에는 그 아무도 나에게 옷을 만들어 선물하지 않았다. 몇 달 동안 한땀한땀 뜨개질 하시던 모습이 무척이나 그립다. 누구 옷을 만드냐는 내 질문에


“그런 건 알아서 뭣하니? 그냥 굴러다니는 털실 아까워서, 하나 만드는 거지.” 


이렇게 퉁명스럽게 대꾸하셨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새로 산 파란색 털실 뭉치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줄자로 내 팔 길이를 연신 재어보셨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돋보기 안경을 끼고는 햇볕 비치는 창가 의자에 앉아계셨다. 탁자에는 일본어로 설명이 적힌 뜨개질 책이 펼쳐져 있었다. 할머니께서 어떻게 일본어를 읽으실 줄 아시는지 궁금했다. 알려주지 않으셨다. 


“일본어로 이건 뭐라고 불러요?” 


여러 번 물었지만, 대답하시지 않고, 슬픈 미소만 지으셨다. 어쩌면 할머니께서도 파란색을 좋아하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파란색만으로 매번 내 스웨터를 만들지 않으셨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두 살 터울인 여동생에게는 흰색 스웨터만 만들어 주셨다. 파랑은 자유, 하양은 평등을 의미한다고들 한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청춘을 일제에 빼앗긴 한반도에서 보내셨기 때문일까? 자유롭고 평등한 두 색깔로 매번 옷을 만드신 것은 아마도 할머니만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파란색을 좋아한다. 하지만 여동생은 흰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외할머니의 무남독녀 외동딸인 어머니는 어릴 적 할머니께서 직접 만든 옷을 입지 못하셨다. 한국전쟁 이후 먹고 살기 힘든 시기에 그럴 여유는 아예 없었을 것이다. 외할머니의 고향은 삼천포이다. 결혼 후부터는 계속 부산에서 사셨으니, 결국 한 평생 바다를 보며 사셨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높은 언덕 위의 집, 나의 외갓집 담 너머로 보이는 바다의 모습은 내 고향 부산에 대한 상징으로 나에게 각인되어 버렸다. 바다, 부산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풍경이다. 


파란 파도는 육지에 닿아 ‘철썩’, 흰 거품으로 부서지며, 다음 파도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육지가 깎여 없어지지 않는 것은 가져간 만큼, 다시 돌려놓고 가기 때문일 것이다. 밀물이 있으면 썰물이 있고, 큰 파도가 있으면, 작은 파도도 있다. 파도의 의미를 나는 모른다. 과학자들도 파도가 왜 치는지 아직 잘 모른다고 한다. 파도가 무엇인지 아는 힘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닐까? 동의해야 할까? 그리고,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밀어닥치는 파도와 같은 할머니의 사랑, 그런 사랑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는데, 나도 똑같이 할 수 있을까? 내 힘으로는 안 될 것 같지만, 될 것 같기도 하다. 파도는 파도를 손잡아 이끈다. 사랑도 파도와 같다.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액자를 걸어둘 넓은 벽이 생기면 반드시 이 그림을 내 방에 걸어둘 것이다.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커다란 파도 그림을 보고 있으면, 온갖 잡념과 더러운 것들이 한꺼번에 씻겨 내려가는 듯하다. 파도가 일본 최고의 산인 후지산을 삼켜버릴 듯 커다랗고 생동감 있어 보인다. 이렇게 거대한 파도 아래 있으면 겁이 나야 하는데, 원색에 가까운 파란색 때문인지, 아니면 그림을 잘 그려서 그런지, 피하기보다는 한 번 그림 속 파도에 뛰어들고 싶게 만든다. 파랑은 차가운 색인데, 이 그림에서는 따스하게 느껴진다. 파랑이 가깝게 보이는 색상이기에, 큰 파도가 더 가깝고 친밀하게 느껴져서, 정겹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미술은 문외한이다. 그저 내 마음대로 감상만 할 뿐이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 있는 파란색은 이 그림 속에 있다. 할머니의 파란색도 이 그림 속에 있었으면 좋겠다. 할머니의 흰색도 아마 같이 있을 것이다. 


예로부터 자연에서 파란색 색소는 매우 발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바다와 하늘의 경우 실제로 파란 것이 아니라 빛의 산란 때문에 파랗게 보이는 것이며, 거의 모든 동물과 식물 중에서 실제로 파란색 색소를 몸에 지닌 종은 1%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는 ‘프러시안 블루’라는 그 당시 최신 인공 합성안료를 사용했다고 한다. 2014년 일본의 나카무라 슈지는 파란색 LED 발명의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다. 오랜 시간 구현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청색 LED를 발명한 것이다. 파랑은 원래 있던 색이 아닌 인류가 노력해서 얻어낸 색상이다. 


 고추감 익어가고, 길가의 코스모스 손짓하는 가을이 되어, 강쇠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무심결에 할머니의 스웨터는 무척이나 따뜻했는데, 하고 중얼거리곤 한다. 말썽꾸러기 7살, 4살 두 딸을 양육하는 것은 때론 무척이나 고되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척이나 많다. 시간, 돈, 열정, 인내, 그리고 수많은 특별한 날 받고 싶은 끝없는 선물들. 우리 아이들이 그 순간 나에게 바라는 것은 선물이지만, 내가 주고 싶은 것은 선물보다는 사랑이다.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어린 시절 나와 같이 자꾸만 쓸데없는 것들을 바란다. 이번에는 토끼 인형이 가지고 싶고, 다음 번에는 곰인형이 가지고 싶다. 작년에 사 준 곰인형은 예쁜데 귀엽지 않다. 등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들기에, 내가 왜 이런 것들을 아깝게 돈 들여서 사 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러한 과정 자체가 행복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마중물이 나에겐 있다. 할머니의 파란 스웨터이다. 사랑하면 삶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무척이나 행복하다. 우리 두 딸도 좋아하는 색깔이 있다. 핑크색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캐치 티니핑 하츄핑의 색깔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내 행복의 걸음마다 파란색 추억이 너울져간다. 그리고, 핑크색 추억도 아이들 마음속에 자리잡아 가겠지. 분명 할머니께서도 파란색을 좋아하셨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도 아이들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색깔을 핑크색으로 바꿀 수 있을 듯 하니까. 아이들 얼굴에 핑크빛 미소가 떠오르면, 내 마음도 조금씩 핑크빛으로 물들어간다. 

작가의 이전글 부산 차이나타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