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회 구미문예 공모전 입선
-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
국화꽃이 죽었다. 작년 봄부터 베란다에서 기르던 미니 국화가 죽었다. 처음부터 시름시름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물도 주고, 영양제도 주면, 몇 번 새로운 줄기를 내밀고, 말랐던 잎이나 꽃이 생기를 찾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소생할 가능성이 없는 것 같다. 국화가 죽은 것이 무어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유난스럽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은 국화 옆에서 마음이 슬퍼지는 까닭은, 한 동안 잊고 있었던, 국화꽃을 유달리 좋아하셨던 어릴 적, 은사님 한 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를 가르친 많은 선생님들이 계셨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만큼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내 인생에 좋은 영향을 끼치신 분은 없었다.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겠지만 그 분보다 내가 더 존경할 분을 만날 일은 아마 없을 것 같다.
우리 학교로 전근 오신, 첫 해였기에, 4학년 첫 날이 첫 만남이었고, 첫 인상을 기억해보자면, 작지만 당당한 체구에 눈에 힘이 있으시고, 꽉 다문 입술 사이로 단호함과 힘이 느껴지고, 무늬도 없는 단색의 단정한 복장에 평범하지만 빈틈없어 보이는 30대 후반 여자 선생님이셨다. 누가 보더라도 교단이 어울리실 것만 같은 그런 모습이셨다.
그 당시는 물리적인 체벌이 당연한 시기였는데, 첫 일주일 동안 숙제 안 한 학생들을 때릴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을 하셨다. 체벌을 하지 않자 점점 숙제 안 하는 친구들이 늘어났고, 결국은 매를 드셨다. 조그마한 매로 손바닥을 때리면서도 때리고 나서 아프냐고 걱정스럽게 물어보시는 모습이 인상 깊었었다. 한 친구가 눈치 없이 아프다고 대답하자 본인 손을 매로 세게 때리고는 고개를 갸우뚱 하셨는데 그때, 나는 이 분이 지금까지의 다른 보통 선생님들보다 훨씬 뛰어난 인품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업도 열과 성의를 다해 가르치셨지만, 그것보다 더 강조한 것은 인성 교육과 기본적인 예절 교육이었다.
첫 번째로 하신 일은 더 이상 부모님을 아빠, 엄마라고 부르지 말고, 최소한 아버지, 어머니로 높여 부르게 하셨다. 부모님은 가장 존경 받아야 하실 분인데 왜 다른 어른들을 대통령님, 선생님 이렇게 높여 부르면서 아빠, 엄마로 낮춰서 부르느냐, 감사와 존경을 담아 꼭 최소한 아버지, 어머니로 높여서 부르라고 하셨고, 한 달 내내 각 가정에 가정통신문을 보내서 결국 모두가 아버지, 어머니란 호칭을 쓰게 만드셨다.
두 번째로는 점심시간에 돌아다니면서 먹는 것 금지, 음식을 입에 넣을 때 외에는 입을 꼭 닫아서 다른 사람에게 입 안의 음식물을 보이게 하지 말 것, 그리고, 밥과 반찬을 남기지 말고 다 먹을 것을 지시하셨는데, 다른 것은 금방 지켜졌으나, 한참 반찬투정이 심할 때라 밥과 반찬을 남기지 않는 일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서, 특단의 조치로 설거지를 숙제로 내기도 하셨다.
수업시간에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 라는 시를 읽어주시며,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하는 대목에서, 동생들이 자신에게 하는 말 같이 느껴져서, 읽을 때마다 감동을 받는다고 하셨다. 당연히 국화꽃도 좋아하셨다. ‘국화꽃’은 시련과 고통을 강한 내적 힘으로 인내한 긍정적인 삶의 꽃이라 할 수 있다. ‘국화꽃’과 ‘누님’의 모습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영혼의 강인함을 드러낸다. 검소하고, 인성과 기본을 강조하신 선생님과 국화는 너무나 닮은 점이 많은 듯 하다. 선생님 가족이 아닌 내가 볼 때도, 선생님께서는 국화꽃을 닮으셨다. 존경하였기에, 졸업 후에도 계속 연락을 드렸고, 우리 부모님과도 교류가 있으셨다.
그 분이 내게 한 칭찬을 나는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정말로 자유로운 생활을 해 버렸다. 공부는 뒷전이고, 매일 친구들과 놀고, 밤 늦게까지 술 마시고 돌아다니곤 하였다. 이런 내가 걱정이었는지 어머니께서 내가 행여 나쁜 짓이라도 하게 될까 봐 걱정이라고 선생님께 말씀 드렸는데, 그 때 선생님께서는 아주 단호하게
"어머님, 지금까지 그렇게 착한 애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아이는 십 원짜리 하나도 훔칠 애가 아닙니다. 절대 나쁜 길로 들어서지 않을 테니, 전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라고 하셨다고 한다.
나는 아직까지 그 누구에게서라도 그것보다 더 큰 칭찬을 듣지 못하였다. 살아오면서 때로는 비겁하거나 옹졸한 짓, 남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일들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항상 선생님의 칭찬이 생각나서 나는 스스로 자책하고, 반성하면서 선한 일에 최대한 힘쓰며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그 분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군대 제대 후 어머니와 같이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때였다. 선생님 부군과 함께 맞은편에서 걸어오시는 걸 봤는데,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셨다. 초점 없는 눈과 헤 벌어진 입,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쭈뼛쭈뼛 다가서려는 나를 어머니께서 조용히 소매를 잡아 만류하셨다. 내가 군대에 있는 동안 선생님의 어머님께서 돌아가셨고, 그 일로 충격을 받으셔서, 마음의 병이 생기셨다고 하셨다. 그 후로 간간히 소식을 들었지만, 다 좋지 않은 소식이었고, 점 더 세월이 지나자, 그마저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졌다.
선생님, 꼭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 뵙고 싶습니다. 사제의 연이 시작된 지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지금도 문득문득 선생님 모습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합니다. 십 원짜리 동전을 볼 때도, 그리고, 지금 우리 집 베란다의 말라버린 국화를 볼 때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습니다. 보여주신 크신 사랑과 믿음, 남에게 베풀며 잘 살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