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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영 Jun 14. 2021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고졸 직원의 부서를 넘나드는 농단

 누군가 이런 말을 했던 게 기억난다. “너무 많은 것을 알아도 병이야.”라는. 사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알면 알수록 많이 보이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조금은 편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문제는 많이 알다 보니 많은 게 보이고, 많은 게 보이다 보니 상관을 하게 되고, 상관을 하다 보니 자신은 물론 상대방도 피곤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많이 알고 있어도 내색하지 않고, 그냥 관조하는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하지만 그게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닐 게다. 나 또한 알고 있으면 알려주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니까.


 결혼 전,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한창 바쁘게 일할 때였다. 나 같은 경우엔 일이 몰릴 때는 한꺼번에 몰리고, 또 일이 없을 땐 한동안 쉬어야만 했다. 일이 많을 때는 숨이 “컥” 하고 막힐 정도로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반면 일이 없을 때는 너무 한가한 나머지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게 바로 어설픈 프리랜서의 고충이 아닐까 싶다. 여하튼 꽤 오랜 시간 동안 일이 없을 때가 있었다. 그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잠깐 외도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동안 해오던 글쓰기 작업이 아닌 수입 애니메이션 관련 기획 일이었다. 게다가 정식 직원이 아닌 계약직이라서 부담도 덜했다.


 그 회사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수입하는 업체로서 캐릭터를 활용한 다양한 마케팅 사업도 추진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사업들도 계획 중에 있는 게 많아서 앞으로의 전망이 꽤 밝은 그런 회사였다. 그 당시 수입한 애니메이션은 국내에서 반응이 아주 좋았던 터라 동시에 그 회사도 빠르게 성장하는 추세였다. 솔직히 그동안 내가 해오던 일과는 전혀 다른 분야여서 겁도 났지만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에 한껏 부풀기도 했다.       


 첫 출근 날, 회사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아기자기한 분위기였다. 사무실도 소규모인 데다가 직원들도 많지 않아서인지 모든 게 한눈에 들어왔다. 난 기획 파트에 자리를 잡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파악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그 회사가 수입한 모 애니메이션 수입국은 일본이었고, 그에 따른 계약 관련 서류들이 수북이 쌓여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부서별로는 기획부, 마케팅부, 영업부, 경리부 등 네 개의 부서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부서 대비 직원의 수는 적은 편이었다. 따라서 다소 의아했지만 그래도 회사가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기에 그다지 문제가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난 기획부에 있었지만 주 수입국이 일본이다 보니 일본어도 배워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침 출근 전, 회사 근처에 있는 일본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가장 기본적인 회화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회사 내에서의 이상한 기류가 느껴졌다. 그러니까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꼭두각시라는 느낌이 든 것이다. 그 한 사람은 그 회사의 사장과 거의 동급처럼 느껴질 정도로 힘이 막강했다. 그 사람의 말이라면 사장도 무조건 수용하는 식이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그 사람은 나이가 어린 고졸 출신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뛰어난 일본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일본과의 거래에 있어서도 남다른 전략과 임기응변으로 인해 매번 어려운 상황들을 무난히 잘 넘기곤 했다. 그러다 보니 사장도 그런 그녀를 무조건 믿고, 모든 것을 지원해 주었다. 그래서였을까? 나에게 비친 그녀의 모습은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이미 권력의 빛에 물들어 순수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방을 감시하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과 너무도 당당해 보이는 자태는 나이 많은 직원들도 주눅 들기에 충분했다.


 나 역시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고, 그런 그녀를 대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이것저것 상관하는 게 도를 넘어서 매일같이 스트레스로 작용을 했다. 그녀의 상관 범위는 기획부는 물론 영업부, 마케팅부, 심지어는 경리부까지 모든 부서를 다 아우르고 있었다. 사실상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각 부서의 돌아가는 상황들을 모조리 다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말이다. 그 순간 난 소름이 끼쳤다. 그동안 궁금하게 느껴졌던 부분, 즉 사장과 거의 동급인 그녀, 부서 대비 적은 직원 수, 그리고 권력을 거머쥔 어린 그녀 등 퍼즐이 하나둘씩 맞춰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회사가 설립될 당시 사장이 데리고 온 직원이라고 한다. 사장은 수입 애니메이션 쪽으로 일할 계획을 세웠고,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일본어에 능통한 직원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고 곧 지인을 통해 그녀를 소개받게 된 것이다. 당시 그녀는 일본어와 일본 애니메이션에 아주 관심이 많았던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사장과 그녀의 인연을 시작으로 그 회사는 꾸준히 성장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했을 것이고, 이후 회사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권력을 거머쥐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각 부서를 넘나들며 일일이 상관할 때도 누구 한 사람 싫은 내색조차 하지 않았고, 그저 시키는 일만 묵묵히 할 뿐이었다. 나도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한 번은 경리부에서 하는 일까지 하나하나 상관하면서 그녀와 나이가 얼추 비슷한 경리 직원을 향해 뭐라고 막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 경리 직원은 겁먹은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그녀는 거래 관련 서류철을 책상 위에 집어던지면서 뭔가를 지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늘 그랬던 것처럼 직원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신의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 그 회사에 대한 거부감이 일기 시작한 때는 그 회사에서 일한 지 약 3개월가량 됐을 때다. 꼭두각시 같은 직원들, 나 몰라라 하는 사장, 그리고 각 부서를 넘나들며 갖은 농단을 펼치는 그녀…….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어서 잠시 외도를 한 곳! 그곳에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기가 막힌 광경들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엔 그냥 기분 나빠서 일을 그만두긴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회사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의 위험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초고속으로 성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성공한 사람,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밟아온 사람들도 있다. 흔히들 밑바닥부터 시작한 사람들은 자신이 힘들었던 만큼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다고 하는데, 그 이면에는 위험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서 끝까지 모든 것을 다 아우르고 있는 만큼 일일이 다 상관을 하게 되고, 그게 결국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회사 내 농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 보이는 것을 다 상관하다 보면 결국 자신은 물론 상대방도 지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는 만큼 보이지만 그냥 못 본 척하는 것도 또 하나의 삶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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