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문장들은 뿌리가 길고 깊고 단호했다. 한 문장을 잡아당기면 엿가락처럼 계속 이어지기도 했고 감자 줄기처럼 다른 엉킨 문장들을 소환해오기도 했다. 하나의 문장을 겨우 뽑았다고 안도할라 치면, 그 자리에 새로운 듯 하지만 알고 보면 이 전 문장의 반복에 불과한 클리셰 문장들이 바짝 뒤 따라왔다.
이런 문장들을 서둘러 치워 낼 수 있는 문장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 문장들에 다닥다닥 들러붙은 마음에 ‘저항’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에도 나는 저항감을 느끼곤 했다.
한 사람의 기둥이고 뿌리였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을 떠받쳐주고 있는 문장들이었고 한 사람의 기원과 역사 기억과 관계 속에서 장대한 기능을 감당해왔기 때문이었다. 문장이 무너지는 것을 자신이 무너지는 것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었고 이 역시 또 환상이 아닌 실제를 어느 정도 담고 있었다. 우리 안에 어떤 문장이 돋아난 이유는 어떤 경험을 지나왔기 때문인데, 경험으로 도달하게 된 문장들은 힘이 셌다. 특히 나쁜 경험을 통해 도달하게 된 문장들은 힘이 더 억셌다. 어떤 경험은 우리 안에 완강하고 억센 문장들을 불가피하게 심어놓는다.
이런 문장들에 저항이라고 하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마치 불가피한 것을 가 피한 것처럼 오해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또 더 머물러 함께 해주어야 할 마음에 너무 쉽게 이름 붙이고 지나치는 일인 것만 같아서, '저항'이라는 명명을 폐기하고, 모든 마음에 각자의 이름을 따로 붙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안의 방어는 어떤 방어벽이 절실히 필요했던 때가 있었음을, 또 때론 그때가 여러 번 계속되어 몰아치던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었음을 가리켜 준다. 하지만 기능을 다한 후에도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방어벽만큼 허망한 것은 또 없다.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세웠지만 결국 자신을 가두는 방어벽을 치우기 위해 상담실에 온다.
그런 면에서 상담은 일종의 벽을 만지고 두드려보는 작업이다. 가벽이어야 했는데 너무 견고하게 세우 고만 방어벽을 잘 치우고 이제는 그 벽을 자신을 지키는 울타리로 활용해 나가는 것을 함께 하는 작업.
벽에 창도 내고 여닫이 문도 달고 자신이 원하는 빛깔로 벽에 자신의 그림을 심어 가는 작업을 필요한 만큼 함께 가는 길. 하지만 그 벽을 치우기가 어렵고 까다롭고 필요하지만 또 그러고 싶기도 그러고 싶지 않기 하기에 이런 마음을 둘러둘러 가는 마음의 여정에는 굴곡과 부침이 많았다.
우리 안의 굳세고 억센 문장들,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문장들은 간단히 축출되거나 삭제되지 않는다. 우리를 손톱처럼 할퀴고 간 경험들이 우리 안에 남긴 상처의 문장들은 경험으로 지나갔기에 역시 경험으로만 지나갈 수 있기도 하다. 명확히 보아주는 눈과 정확히 들어주는 귀, 과정을 함께 하는 마음이 있어야 재경험은 비로소 가능하다.
상담자들은 누군가의 내면에 자리 잡은 억센 문장들을 함께 듣고 바라봐준다. 섣불리 허물려하지 않고 내담자들이 문장의 미로를 헤매는 과정을 따라간다. 상담자도 단지, 이 미로의 입구에 대한 기억과 과정에 대한 통찰이 있을 뿐 이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는 알 수 없고 그 역시 자기 내면의 미로 벽을 헤매는 한 사람에 불과하기에 내담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헤맨다.
하지만 이 모든 헤맴의 본질은 같이 한다는 데에 있다. 함께라는 연결의 끈만 느끼고 있다면, 우리 내면의 억센 문장들은 꺼내어 발화하는 과정에서 이미 조금씩 흐물흐물해진다. 내 안에 맴돌고 있는 사나운 문장들을 겨우 꺼내었을 때, 이를 단칼에 단정 짓거나 평가함으로써 그 어려운 마음을 허물려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을 때, 그때에야 우리는 자기 안의 벽을 스스로 허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