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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선 Sep 21. 2021

혼술 하다 보니 이런 일도

프로운명러의 생애 첫 혼술 에피소드

나는 프로운명러다.

프로운명러의 장점을 하나 꼽자면 고민이 없다. 직관, 운명적 느낌이 오는 순간 고민이란 게 사라진다.

대표적 예로 소비에 큰 고민이 없다. 평소 고민하던 스타일의 옷이 길가다 우연히 본 매장에 있다면 운명이다 싶어 바로 들어가 결제한다. (안 입어 볼 때도 많다.)

요즘 피지컬 음반들을 모으고 있는데, 이 소비 기준의 최정점에 운명론이 있다. 카세트테이프, lp는 구하는 게 힘들다 보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중고든 새 제품이든 찾던 앨범을 만나면 역시 이래서 내가 여기 오고 싶었구나 라며 바로 결제를 하게 된다. (가장 최근 사례는 이태원에 들렸다 겸사겸사 바이닐 앤 플라스틱 매장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높은 리셀가를 줘도 못 구하는 AODY 카세트테이프를 만나 바로 데리고 왔다.)


사랑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부터 학습된 디즈니 공주님들의 스토리 효과인지, 나에게도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이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다. 특히 20대 초반에는 로맨스 영화 중에서도 '비포 선라이즈', '김종욱 찾기' 같은 영화에 열광했다. 두 영화 다 주인공 남녀가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여행을 하며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영화 속 이국적 배경은 이들의 만남을 더욱 운명적으로 만들어 줬다. 말 그대로 영화 같은 스토리를 보며 나에게도 이런 영화 같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막연한 환상은 깊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더욱 확고하게 프로운명러로 만든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



사건이 발생한 그날의 날씨, 공기, 분위기는 만연한 봄이었다.

햇살은 따사롭지만 차가운 바람이 부는 가짜 봄이 아니었다. 나무 가지 새순의 색깔이 가장 예쁜 초록일 때, 정확히 표현하면 봄에서 초 여름을 향해 나아가는 계절이었다. 내가 일 년 중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계절이라 매년 이맘때가 되면 나는 기분이 들뜨고 이유 없이 설레었다.


하지만 그 해만큼은 아니었다. 이미 마음 떠난 남자 친구 A와 억지로 이어온 관계가 얼마 전 끝이 났기 때문이다. 햇수로 6년 차, 나름 오래 만났고 만나는 동안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에 후회는 없었지만, 이별에서 몰려오는 상실감과 공허함을 나 혼자 오롯이 감당하기엔 정말 힘들었다. 그렇다고 원래 일상을 포기할 수 없으니, 꾸역꾸역 회사에 출근하고 억지로 약속을 잡아 친구들을 만나며 이 시간이 흘러가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헤어진 A와 나는 사귈 때 당시 회기-외대 앞 인근에 살았다. (물론 헤어질 때쯤엔 각자 사는 동네가 달랐지만) 같은 모임 안에서 만난 사람이라 지인이 겹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헤어지면 땡이 아닌, 어떻게든 소식이 들려오고 들을 수 있는 사이였다. 그날 나는 회기동에 일이 있어 방문을 했고, 외대 쪽에서 회기 방향으로 걸어가는 골목길에서 A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단 둘이 마주친 건 아니고 맞은편에서 A의 친구들이자 나도 잘 아는 지인들이 보였다. 무리 뒤편에서 보이는 A의 형체에 내 심장이 바닥으로 쿵 - 떨어졌다. A는 아마 나를 먼저 발견하고 천천히 오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죄지은 사람 마냥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은 우리가 서로에게 헤어짐을 고하고 딱 한 달만에 마주친 상황이었다.

 

그때의 기분은 정말 좋지 않았다. 물론 헤어진 사람과 마주치면 누가 좋겠냐 만은, 진짜 또다시 이별을 한 기분이었다.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는데, 나는 한 달 전 헤어질 때와 조금도 좋아진 게 없다는 사실이 더 힘들었다. 과거의 시간에 갇혀 허우적 대는 내 꼴이 너무 초라했다.


저절로 술 생각이 났다. 이 순간만큼은 맨 정신인 게 싫었고, 내가 아는 방법 중 맨 정신에서 가장 빠르게 로그 아웃하는 방법은 술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지금 당장 술을 같이 마셔줄 사람이 없었다. 그럼 혼술을 해야 되는데, 이때까지 나는 가게에서 혼술이란 걸 해본 적 없던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상황도 혼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곳은 나름 대학가이고, 지금은 일요일 저녁이라 술집엔 사람들은 꽤 있을 것이다. 그것도 대학생들..!! 그냥 집 근처 동네로 갈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기분 그대로 55분간 지하철을 타고 가고 싶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회기역까지 와 있었다.


회기역 1번 출구 앞에 위치한 골뱅이 집


그때 마침내 눈에 들어온 회기역 앞 골뱅이 포차...!! 예전 학창 시절 친구들과 이곳에서 통 골뱅이를 포장했던 곳이다. 짧은 시간 많은 생각을 했다. 위치상으로나, 메뉴로 보나 대학생 감성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밖에서 얼핏 봤을 때 가게 안에 아무도 없어 보였다. 지금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혼술의 최적의 장소는 바로 이곳이었다.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경주마처럼 좌우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사장님께 혼자라고 말하고 안내해주시는 자리에 앉았다. 통골뱅이 小자와 자몽의 이슬 한 병을 시켰다.

마음은 이미 깡소주 몇 병을 마셨지만, 원래 소주는 못해 자몽의 이슬을 시켰다. (뼛속까지 소맥파인데 도저히 혼자 소맥을 말아먹을 자신이 없었다.)


주문한 술과 골뱅이 그리고 기본 반찬인 단무지와 홍합, 골뱅이 국물 한 컵이 나왔다.

복잡 미묘한 마음으로 자몽의 이슬 뚜껑을 열었다. 내 생에 첫 혼술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조심스럽게 소주잔에 따랐고 그대로 원샷했다.

'캬 -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한잔 딱 마셔보니 생각보다 혼술이 괜찮았다. 술도 한잔 한잔 부담 없이 잘 들어갔다. 이상하게 안주는 손도 대고 싶지 않았다. 단무지 조차..!! 분명 난 골뱅이를 정말 좋아했는데 말이다. 정말 오롯이 술에만 집중하여 마셨다. 가게 처음 들어올 때는 슬프고 비참한 기분이었는데 당당히 혼술을 즐기는 나 자신이 대견해졌다. 오늘 이 순간을 기점으로 어른으로 한 단계 성장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혼술은 처음이다 보니 술기운이 올라오면서 조금은 어색했고 같이 마실 사람이 있으면 더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 대로 절친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어디냐, 뭐하냐'라는 질문을 했고 이미 그 친구는 다른 친구와 주말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전화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떠오르진 않지만, A를 한 달 만에 길바닥에서 마주쳤으며 내 처지가 너무 한심스러워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는 신세 한탄으로 통화는 귀결되었다. 정신없는 전화를 끊고 나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소주잔 8번으로 자몽의 이슬 1병을 다 비워 갈 때쯤,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 혼자 오셨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순간 잘 못 들었나 싶었다.

이 가게에 손님은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헛것이 들릴만큼 내가 만취 상태인가 싶어 말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옆 테이블에 2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B는 다시 나에게 질문을 했다.



*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이미 예상했겠지만, B는 그날 이후 공식적인 남자 친구가 되었다.

영화, 드라마 같은 운명적 만남을 꿈꾸던 그때 그 시절의 나에겐 너무 신기한 사건이었다.

아 물론 첫 만남의 장소가 유럽 어디 낯선 기차안 옆자리 대신 통골뱅이 포차집이긴 했지만, 인과관계를 따져보면 전 남친 A 덕에 새로운 남친을 만나게 된 것이다. (A와 헤어진 지 한 달만에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기에 골뱅이집에서 생애 첫 혼술을 하였고 그 덕에 새로운 인연을 만날 상황이 주어졌으니 말이다..!!)

그때의 나는 이별의 휴유증이 상당히 심했다. 이별 후 힘든 내용은 생략하겠다. 다들 아실거라 생각하니까, 확실한건 자존심 상하지만 더 좋아한 사람이 나라서 더 힘들었다. (개인적으로 더 사랑한 사람이 헤어져도 약자라 생각한다.) 그런 나에게 때마침 나타난 B라는 존재 덕에 이별 휴유증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곧 죽을 것 같았는데 생전 처음보는 B에게 연애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나에게 신기했고 '역시 인생은 타이밍' 이라는 명언에 또 한번 깊게 공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청 신기한 일은 아니다. 헤어진 전남친과 마주칠 수 있고, 혼술 하다 합석할 수도 있는 누구에게나 한번쯤 벌어질 법한 일이다. 특별하지 않다. 심지어 그 시작도 아주 상투적이고 뻔한 말 한마디 였다. 그럼에도 나는 어쩌면 이게 운명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B와도 서로 신기해했으며 우리의 먼 미래에 대해서도 말하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닌 걸 안다.

운명이면 지금도, 앞으로도  옆에 있을 테니 말이다.

B와의 헤어짐의 여러 원인이 있지만 지금의 내가 결론 내린 가장 큰 이유는 서로 추구하는 가치가 너무 달라서다. 아무리 운명의 상대라도 연인 관계에서는 서로의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울 수 있는 연애였다.


그런 의미에서 B는 운명은 아니었지만

B는 나의 연애사에 있어 중요한 변곡점이라 회상하고 기록한다. 문득 B에게 나는 무엇으로 남았을지도 상당히 궁금하다.





안녕하세요,

드디어! 브런치에 첫 글을 발행해보는 신입 작가입니다 :)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라, 첫 글은 어떤걸로 발행할지 정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 작가의 서랍을 보는데, 2년전 처음 브런치를 가입하고 써둔 글 하나를 발견 했고 바로 이 글입니다. 과거의 제가 쓴 글임에도 존재를 잊고 있다 이번에 다시 발견한 글이었죠,

당시 브런치 작가가 되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것이라? 전혀 예상히지 못했고

연재라는 연속성을 가지고 써야 한다는 개념 조차 없이 나도 작가가 될 수 있겠단 생각에 그저 설레고 들뜬 마음으로 써내려간 글이었습니다.

 

글쓰는게 힘들어지면 처음 브런치에 글을 쓰던 초심자의 마음을 기억하고자 정말 많이 부족하지만 살짝의 퇴고를 거쳐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쓰는 저만 만족하는 글이 아닌, 보는 이들도 즐겁게 볼 수 있는 글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합니다.


혹독한 피드백도 감상도 언제나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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