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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성일 Jun 12. 2020

#14 푸르고 아름다운 학살장

발화되지 못하고 사라진 이야기들


힘 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7월의 캄보디아, 그날은 유난히 더웠지만 더위 때문이 아니다. 파란 하늘 아래 그곳은 너무 평화롭고 예뻤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몸에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방금 내가 무얼 본 거지??'



아름다운 학살장


서른이 되면 세계여행을 떠나리라 꿈을 품었던 때가 있었다. 여기도, 저기도 가봐야지 표시했던 곳 중에는 꼭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기억하리라 마음먹은 공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베트남에 가면 전쟁박물관(War Remnants Museum)을, 미국에서는 반드시 911 테러 추모공원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에, 폴란드에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Auschwitz-Birkenau State Museum)를 꼭 보고 싶었다. 그리고 캄보디아에는 앙코르 와트보다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를 먼저 적어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목도한 청아익 킬링필드(Cheung Aek killing fields)는 그 이름이 무색하게도 너무 예뻤다. 들풀이 파랗게 덮인 땅과 산책로처럼 꾸며진 동선은 여느 공원 못지않았다. 그러나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와 아름다운 지면 바로 아래 도사린 참담한 죽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조용히 앉아 숨을 고르는 것뿐이었다. 꽃과 나비가 한가로이 움직이는 흙과 나무 사이에서 아직도 채 수습되지 못한 옷가지와 뼈를 보았다. 생명을 빼앗긴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 앞에서 한참을 앉아있었다.   


청아익 킬링필드 안내 지도. ⓒ2017 Noh Sungil.
유해를 밟지 않도록 정해진 동선을 따라간다. ⓒ2017 Noh Sungil.
위령탑 내부 ⓒ2017 Noh Sungil.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1970년 친미 쿠데타로 크메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론놀(Lon Nol) 치하 캄보디아는 태생적으로 미국이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한 도구로 시작되었다. 날이 갈수록 부정부패와 베트남인 박해로 사회 혼란이 심해지고, 베트남 인민군에서 시작된 크메르루주(Khmer Rouge) 게릴라와 정부군의 내전을 피해 수많은 난민이 프놈펜으로 들어온다. 삶의 질이 급격히 나빠진 상황에서 크메르루주 군이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다. 그러던 1975년 4월 미군의 베트남전 철수 소식에 이은 크메르루주 군의 총공세에 론놀은 하와이로 망명하게 되고, 4월 17일 크메르루주 군대가 프놈펜으로 들어온다. 프놈펜 시민들은 크메르루주가 이제 상황을 바꿔주리라 믿으며 거리로 나와 환호를 질렀다. 그러나...


“1975년 크메르루주의 최후 공격이 있었다. 론놀은 망명했고 4월 17일 크메르루주 군대는 프놈펜을 장악했다. 기괴한 실험이 시작되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선례도 없는 대실험이었다. 앙코르 와트 건설이나 크메르루주의 실험이나 모두 인류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며 인간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시도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런데 앙코르 와트는 신의 도시를 건설하는 작업이었다면 크메르루주의 실험은 도시를 해체하고 농촌에 인간의 신세계를 만든다는 발상이었다. 도시 및 작은 읍 단위의 거주민은 전부 농촌으로 이동할 것이 지시되었다. 모든 인력을 농촌에 투입해 농업생산력을 늘려 자립적 국가 경제의 기초를 확보한다는 게 그 취지였다. 
인구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반혁명 분자 처형도 뒤따랐다. 이동 과정에서의 굶주림, 질병, 고문, 폭력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자의 또는 타의로 크메르루주의 민주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정권이 살해한 사람의 숫자가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반이 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당시 인구가 500만 명 정도였는데, 200만 이상의 인구가 사라졌다는 게 일반적인 추측이다.” 

 -『동남아시아사-민족주의 시대』, 최병욱, 산인(서울: 2016), 143.


크메르루주의 수장 폴 포트(Pol Pot, 1925-1998)는 중국의 문화 대혁명과 같이 인구의 대규모 농촌 이동을 명령했다. 그가 꿈꾸는 사회주의식 새 세상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혹은 수용소로 끌려가 고문 속에 죽어갔다. 잡혀간 이들의 죄목은 '지식인'이었지만, 단지 손이 하얗다, 안경을 썼다, 영어를 할 줄 안다는 등의 이유로 잡혀온 민간인들도 많았다. 심지어는 부모와 함께 끌려온 어린 아기와 어린이들도 함께 죽임 당했다. 


학살은 지식인에서 민간인과 농민 등 체제에 불응하는 이들로 확대되다가 이후에는 크메르루주 당원들까지도 숙청되기에 이른다. 캄보디아-베트남 전쟁에서 크메르루주가 패배하는 1979년까지, 추정치로 약 20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학살되거나 고된 노동과 영양실조로 죽었다. 내가 방문했던 프놈펜 외곽의 청아익(Cheoung EK) 킬링필드가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학살의 현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킬링필드’가 캄보디아 전역에 셀 수 없이 존재하고 있으니, 그 당시 캄보디아는 말 그대로 ‘죽음의 땅’이었다. 


기억하는 이들이 두고 간 추모의 팔찌 ⓒ2017 Noh Sungil.
꿈을 키워보지 못하고 죽어간 아이를 추모하는 선물 ⓒ2017 Noh Sungil.



킬링필드에서 빠져나와 시내로 들어가기 전에 툭툭 기사 짐 씨가 킬링필드와 관련된 곳을 한 군데 더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이미 마음은 지쳐 있었으나 용기를 내기로 했다. 


한참을 달려, 짐 씨가 시내 한 허름한 건물 앞에 나를 내려주었다. 간판에 적힌 'S-21 투올슬렝 대량 학살 박물관(S-21 Tuol Sleng Genocide Museum),' 대량 학살을 전시하는 곳이라... 

녹슨 문을 지나 너른 공터를 둘러싼 학교 건물이 나타났다. 하늘이 맞닿는 곳에는 철조망이 휘감겨 있었다.


S-21 투올슬렝 대량 학살 박물관 : ‘킬링필드’의 역사적 현장에 대한 자료들을 전시한 곳이다. 1975년 이전에는 평화로운 툴스베이프레이 여자고등학교였으나 공산혁명 단체인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잡자 S-21(Security office-21)이라는 수용소가 되었다. 이곳에는 전직 관료, 군인, 승려, 학생과 그들의 가족들이 감금되었고 가혹한 고문을 받아 죽었다. 당시에 사용되었던 고문 도구와 살해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되어 끔찍했던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2만 여 명이 수용되었으며 대부분이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앞마당에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위키백과)


수용소는 한때 아이들이 꿈을 키우는 아름다운 학교였다. ⓒMichael Gruijters
ⓒ2017 Noh Sungil.
교실을 벽돌로 나눠 감옥을 만들었다. ⓒ2017 Noh Sungil.


세계여행 목록에서 내가 보고 싶은 세계는 다크(Dark)했다. 머릿속 상상을 눈앞에 맞닥뜨린 순간은 침을 삼키기도 괴로울 정도로 참담했고, 내내 멍하고 울렁거리던 기분은 며칠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은 어찌 이토록 잔인할까? 혐오와 증오의 역사는 왜 사라지지 않는 걸까? 인류의 참담한 기억이 담긴 공간을 걸으며 고민과 번민이 차올랐다. 



아시아의 진주


캄보디아는 식민지 시기를 지나면서 1960년대까지 '아시아의 진주(Pearl of Asia)'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문화를 간직한 곳이었다. 수도 프놈펜은 최신 음반과 사교모임이 활발히 열리는 등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중에서도 새로운 문물이 가장 먼저 유통되는 문화의 중심지였다. 


넷플릭스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에 크메르루주 이전의 캄보디아와 킬링필드 사건이 잘 담겨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zHwqTnxm4Y


그랬던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이후 모든 지식은 단절되었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며, 책으로 축적된 문명의 기록은 모두 불태워졌다. 사라져 간 많은 이들이 아픔을 겪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얼마나 다양하고 아름다운 문화가 열매 맺을 수 있었을까? 발화(發話)되지 못한 이야기들은 모두 공중으로, 흙 아래로 사라졌다.


킬링필드에 방문하기 전까지는 솔직히 실망하고 얕잡아봤던 사실들이 그제야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가 왜 기반시설이 낙후된 채 현재 관광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지, 열악한 경제 상황이나 책이 보잘것없는 것까지도…. 캄보디아 현대사의 슬픔을 알고 난 뒤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서점에서 책 디자인이 좋지 않다고 너무 쉽게 판단하고 실망했던 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고통의 현장에 앉아 이름을 적어주는 부멩 씨. ⓒ2017 Noh Sungil.
ⓒ2017 Noh Sungil.


비가 하염없이 내리던 그 날의 투올슬렝에서 여전히 고통의 현장에 앉아 있는 생존자 부멩(Bou Meng) 씨를 만났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한 권 샀고, 내게 건네주기 전 그는 말없이 앞 페이지에 싸인을 해주었다. 써 내려가는 손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달라고, 아픈 역사를 잊지 말아 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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