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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성일 Jul 24. 2020

에필로그. 그래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못다 한 이야기(주섬주섬)



어느덧 긴 여정을 마치고 <크메르 문자 기행>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캄보디아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조금 밀려나 있는 곳이다. 그곳에 고유한 문자가 있다는 사실이 멀리 떨어진 한국인의 일상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문자를 연구하는 나조차도 일상에서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면 캄보디아와 접점을 만들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왜 캄보디아의 문자에 주목하고 계속 이야기를 건네는 걸까?



캄보디아? 음.. 잘 몰라요


사람들을 만나 '캄보디아를 떠올릴 때 어떤 생각이 드세요?' 라는 질문을 자주 한다. 어떤 사람은 앙코르 와트를 말하고, 조금 더 안다면 킬링필드를 말하기도 한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것을 얘기하거나 외국인 노동자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입을 모아 거의 알지 못한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어느 순간부터 속상한 마음이 들면서 다채로운 캄보디아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그래서 매일 글자와 씨름하는 그래픽 디자이너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글자 이야기'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캄보디아를 알려주기로 했다. 



대학원 졸업 작업. ⓒ2017. Nohsungil.


2017년 겨울, 대학원 졸업 작업으로 <크메르 문자 기행>을 공개하면서 처음 사람들과 만났다. 그 당시에는 글자의 첫인상에 주목해 독특하고 화려한 형태를 강조했으나, 발표하면서도 수박 겉핥기에 머물렀던 결과물에 아쉬움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그때까지는 캄보디아를 잘 몰랐고, 형태와 균형에 집착하는 디자이너의 틀에 갇혀있던 것 같다. 그렇게 한계를 느끼며 졸업 작업을 마무리한 뒤로 완전히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다.


두 번째 연구를 시작하며 가장 어려웠던 점은 자료를 모으는 일이었다. 이미 앞에서 알아본 것처럼 크메르루주의 지식 소각으로 캄보디아 관련 자료는 인터넷이나 책, 논문에서 거의 찾기 어렵다. 전통과 철학 관련 자료는 현지에서 직접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듣기 어려운 경우도 많이 있었다. 


다행히도 직접 경험하고 배우길 즐기는 성향이 연구에 도움이 되었다. 관광객이 아닌 탐구자의 마음으로 프놈펜을 오가며 크메르 문자 전문가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자료를 모았다. 박물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고대 산스크리트어 전문가나 통역 의뢰로 만난 키보드 개발자의 이야기 등 연재에 직접적으로 실리지 못한 고마운 인연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너무나 친절한 캄보디아 사람들의 도움 덕에 인터넷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었던 귀한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되었다. 



연재 과정


첫 번째 결과물의 한계를 넘으려 새롭게 준비한 두 번째 연구를 브런치 연재로 정리했다. 글에는 캄보디아와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을 오가며 준비한 결과가 많이 담겼다. 원래 연재의 기획 방향은 지금보다 더 딱딱한 어조였으나, 평소에 듣지 못할뿐더러 대중은 관심도 없는 생소한 주제이기에 조금은 부드럽고 가벼울 필요가 있었다. 여행 이야기를 곁들인 것은 조금은 익숙한 방식으로 주제에 다가가기 위함이었다.


사람을 닮은 글자이기에 인생의 단계를 따라가는 큰 그림을 그리며 연재가 진행되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 올라가는 원고의 특성상 전체를 아우르는 흐름을 보여주기가 쉽지 않았다. 인생의 단계 콘셉트는 이후에 정리할 책에서 살리려 한다.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써놓았던 원고가 있었고, 방향도 어느 정도 잡혀 있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쉽게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새로운 연구 결과들이 살로 붙으면서 중간에 흐름이 바뀌기도 했고, 어떤 부분은 더 깊게, 어떤 부분은 얕게 다루게 되었다. 그래서 이 글까지 21화, 예정보다 한달 정도 더 걸린 긴 호흡으로 연재가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처음 주제를 정하고 3년이 지나는 동안 대학원 졸업도 하고, 직장도 구하고, 결혼도 하고, 퇴사도 했다. 많은 일이 일어나면서도 이 주제를 붙잡고 놓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풀리지 않는 연구의 방향을 잡으려 크메르 문자의 역사를 쭉 정리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역사가 마치 한 사람의 인생으로 느껴졌다. 그것이 흩어진 구슬을 꿰는 실이 되어 모든 정보를 재배치하고 마음에 그대로 꽂혔다. 


'문자'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로 캐릭터(character)와 스크립트(script)가 있다. 언어를 적는 기호로서 '문자'를 나타낼 때는 '스크립트'로 적는 것이 좋지만 인생과도 같은 문자를 추적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캐릭터'로 적어 <크메르 문자 기행(khmer character trip)이 되었다.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은 숱한 세월을 지나 무언가 잃지 않으려 부단히 애쓴다. 모든 것이 사라진 순간에도 말이다. 마치 연극이나 영화에서 개성이 뚜렷하게 부여된 등장인물(캐릭터)이 서사를 진행하듯이, 그 잃지 않으려는 무언가에 얽힌 이야기를 따라가는 과정이 바로 <크메르 문자 기행>이다.


모든 이야기를 돌아, 결국 나는 크메르 문자를 통해 '사람'을 말하고 싶었다. 낙후된 경제 여건, 유명 관광지, 외국인 노동자의 나라, 오리엔탈리즘 등의 프레임에 둘러싸인 캄보디아가 아니라 스스로 꺼내는 덤덤한 자신의 이야기. 

문자에는 결국 그 문자가 쓰이는 사회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다. 문자에 담긴 크메르인의 생각, 크메르 민족만이 이해할 수 있는 정신, 몸과 영혼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2017. Nohsungil.



숙제


디지털 매체와 새로운 소통 방식에 사용성이 떨어지는 크메르 문자를 보면서 내 마음 한편에는 '혹시나 이 문자가 사라지지는 않을까?' 하는 조마조마함이 자리 잡고 있다. 멸종 위기 동물 기사를 접하며 우리 세대가 그 동물을 직접 보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을 품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말이다. 


기존 키보드 시스템에 사용성 문제가 있다면 크메르 문자만을 위한 새로운 하드웨어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라틴알파벳이 형성한 세계적 보편성에 끼워 맞추기보다는 고유 콘텐츠에 적합한 하드웨어를 만드는 것은 다양성이 확대되는 시대에 적절한 방향이라는 생각도 든다. 성공적으로 실현된다면 더 확장되어 크메르 문자가 속한 문자 체계인 아부기다(Abugida) 체계에 속한 여러 문자권에 두루 쓰일 가능성도 열려 있다. 



하지 못한 말


한 가지 꺼내지 못한 말이 있다. 캄보디아 정치 상황 때문에 문자 개혁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 캄보디아는 크메르루주 이후 평화로운 나라가 되었을까? 안타깝게 그렇지 않다. 오랜 내전을 겪기도 했고, 30년 넘게 장기 집권하고 있는 독재정권이 정치, 경제, 언론 등을 압박하며 새로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캄보디아에서는 공개된 곳에서 정치 얘기를 꺼낼 수가 없다. 문자 개혁이나 교육개혁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지식인들이 자라나면 정권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예산은 언제나 적다. 

맞춤법 개선, 문자 개혁 등 문자 문화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법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정치 얘기를 꺼내지 않았던 이유는 이 콘텐츠가 캄보디아 안에서도 자유롭게 공유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글자들이 너무 비슷하게 생겼다. ⓒ2020. Nohsungil.


마무리


크메르 문자 배우기는 여전히 어렵다. 연재를 처음 시작할 때보다 많이 익히지 못했다. 글자 수도 많고, 비슷한 형태도 너무 헷갈린다. 그래도 글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 뒤로 이전보다 외우기가 훨씬 쉬워졌다.


마쳐야 하는 지금도 입 안에는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많다. 빠른 시일 내에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제는 너무나 절친 같은 크메르 문자가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좋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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