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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성일 Jul 17. 2020

#19  크메르 해부학의 정수

인생의 순환선을 돌아 제자리로


프놈펜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Cambodia)에서는 저녁마다 캄보디아 전통 춤 공연이 열린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조그만 공연장에 앉아 아름다운 춤을 관람했다. 크메르 창조신화인 프레아 통(Preah Thong)과 니앙 니악(Neang Neak)의 사랑 이야기, 천상의 무희 압사라(Apsara)의 동작을 재현한 장면, 다양한 민족의 전통 춤 등이 이어졌다. 


인상 깊은 공연이 끝나고 나오는 길에 공지사항을 보니 매일 오후 공연장에서 전통 춤 워크숍이 열린다는 안내가 있었다. 몸으로 하는 경험은 언제나 큰 즐거움과 깨달음을 주었기에, 이튿날 오후 워크숍에 직접 참여했다. 



국립박물관 공연 중 프레아 통 신화 장면. ⓒ2018. Nohsungil.



워크숍에서는 공연했던 댄서들이 직접 압사라 춤의 기초를 가르쳐주었다. 원숭이, 악마 등 등장인물의 몸동작과 몸으로 표현하는 감정 표현 등 인상 깊은 소개에 이어, 참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압사라의 손동작을 직접 따라 하는 순서가 있었다. 댄서들이 알려준 손동작은 식물의 삶과 죽음의 순환을 표현하고 있었다.  


씨를 심고 - 자라나 - 잎이 열리고 - 꽃이 피고 - 열매가 맺어 - 땅에 떨어지면 - 다시 새 생명이 피어난다.


식물의 순환을 나타내는 압사라 춤 손동작.  ⓒ2020. Nohsungil.


춤 동작에 삶과 죽음, 자연의 순환 원리가 담긴 것이 참 신비롭다. 너른 벌판과 밀림, 거대한 톤레삽 호수에서 자연과 함께 삶을 이어온 크메르인들에게 '순환'이라는 개념은 매우 특별하다. 



은혜로운 크메르 사람


국민의 대부분이 불교도인 캄보디아에는 아들이 부모의 은혜를 갚는 효도의 의미로 머리를 밀고 사원에서 한동안 생활하면서 스님에게 배우는 '부어'라는 문화가 있다. 어머니의 은혜를 갚기 위해 12세에 사원에서 살고, 아버지의 은혜를 갚기 위해 21세에 사원에서 생활한다. 숫자 12와 21이 왜 어머니와 아버지를 상징할까? 


크메르 불교에서 '토아'라 부르는 다양한 기도문 중에서 아이들이 공부하기 전에 외우는 '니악모' 기도문을 보자.

니악모 뽀티이악 세이티앙(대담하고 아름다우신 부처님께 경배합니다. 지혜를 주십시오.)

부지런한 어린이는 오래 살고 새 거울처럼 잘 보입니다. 
공부하는 모든 이는 항상 벼슬길에 오르고 부자가 됩니다. 
그래서 모두 당당하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어렵든 쉽든 공부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스승이 알려주는 모든 걸 정확히 읽으십시오. 
학년이 올라 유명해지고 스승은 기뻐하며, 이제 다른 아이들에게 창피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돌보는 천사들은 공부를 잘할 수 있게 행운을 줄 것입니다. 
천사들이 크메르 아이들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보호하고 슬픔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크메르 민족의 원수들이 연약해져 다시 본국에 돌아가게 할 것입니다. 

*이 기도문을 세 번 외우고 자면 당신이 어려움을 당할 때 마을을 돌보는 천사에게서 좋은 소식을 받을 것입니다. 


이 기도문 첫 줄의 '니악, 모, 뽀, 티, 이악'에는 크메르 우주관이 담겨 있다. 고대 크메르인의 우주관에서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 4 원소, 즉 물, 흙, 불, 바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옛날 크메르인들은 이 4 원소가 지혜를 주는 동시에 불행을 벗어나게 하는 기본 요소라 믿었다. 오래된 팔리어(Pali) 경전에서는 여기에 하늘(우주)과 영혼 요소를 더하여 설명하기도 하는데, 씨엠립 앙코르 유적 니악뽀안(Neak Pean)에 조각된 '하늘을 나는 말'은 바로 이 하늘 원소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왼쪽) 씨엠립의 니악뽀안. ⓒ2006. Chi King    (오른쪽) 4원소+하늘 개념이 적용된 니악뽀안. ⓒ2020. Nohsungil



니악모 기도문 첫 줄에서 각 원소의 의미를 자세히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니악모'에 담긴 의미. ⓒ2020. Nohsungil



4 원소와 크메르 문자


세계를 구성하는 원소들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크메르 철학은 신기하게도 몸의 각 부분을 상징하는 크메르 문자에 담겨 전해진다. 


물 요소 (12) 
담즙, 가래, 고름, 피, 땀, 지방, 눈물, 기름, 침, 콧물, 점액, 소변. 
흙 요소 (21)
머리카락, 털, 손톱 발톱, 치아, 피부, 살, 핏줄, 뼈, 골수, 
신장, 심장, 간, 기관지, 위, 폐, 대장, 소장, 
새로운 먹은 음식, 먹은 지 오랜 음식, 해골, 뇌
불 요소 (4)
체온을 유지하는 불, 몸이 늙게 하는 불, 열이 나게 하는 불,  음식을 소화하게 하는 불. 
바람 요소 (6) 
위로 부는 바람, 아래로 부는 바람, 장 밖에서 부는 바람, 장 안에서 부는 바람, 몸 전체에서 부는 바람, 호흡하는 바람. 
하늘(우주) 요소 (4) 
몸의 구멍 (귀, 코, 입, 항문) 


크메르 문자의 자음 33자는 물과 흙, 즉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나 자식을 낳은 것과 같다. 아들이 12세와 21세에 출가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물처럼 부드럽게 생명을 감싸고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은혜, 몸을 이루는 단단한 흙과 같은 아버지의 은혜. 내 몸의 각 부분이 바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나왔기에 생명을 주신 부모님께 보답하는 것이다. 


크메르 자음이 각각 상징하는 몸의 부위. 노란색은 흙 요소, 파란색은 물 요소이다. ⓒ2020. Nohsungil


몸의 각 부위를 33 자음 순서대로 들여다보면 몸의 순환을 발견할 수 있다.

머리카락에서 시작해 몸 바깥에서 각 부분을 지나 몸속으로 들어가면 장기가 나오고, 각 부위를 채우는 액체들이 몸을 순환한다. 형태가 바뀌지 않는 단단한 흙 요소가 만든 몸의 안과 밖을 부드러운 물 요소가 흐르고 있다. 타이포그래피에서 말하는 글자 해부도(Anatomy of type)와는 또 다른 글자 해부도이다.  

그렇게 흙과 물이 이룬 몸 주위로 열()과 공기(바람)가 순환하며 생명이 유지된다. 몸의 구멍은 하늘, 즉 외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부모에게서 생명을 받은 한 사람이 생명을 이어가려면 가족을 넘어 크메르 공동체에 속한 여러 사람의 돌봄과 은혜가 필요하다. 크메르인의 생명과 에너지가 되어주는 의 은혜, 바람처럼 오가며 소통하는 이웃의 은혜, 외부 세계를 알려주는 하늘 같은 스승의 은혜. 이 모든 사람들과 맺은 은혜에 보답하며 사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크메르 철학의 정수


크메르 전통 춤에서 보았던 자연의 순환과 크메르 우주 속 인간의 순환은 이어져 있다. 모여서 한 몸을 완성하는 33 자음이 또 각각 사람의 형태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옛날 크메르인들이 문자를 만들며 열망했던 것은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순환하며 완성하는 크메르인의 공동체가 아니었을까. 자음 사이를 이어주는 크메르 모음이 24개의 인연을 의미한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크메르 철학의 정수가 바로 크메르 문자에 담겨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니악모 기도문에 등장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이웃과 왕, 스승과 함께 인연을 맺어 공동체를 이룬다. 다 함께 다르마(Dharma, 법) 안에서 도움을 주고받고 순환하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바로 그 이상적인 공동체를 크메르인들은 꿈꿨는지 모른다.



산을 한 바퀴 돌아서


단숨에 정상에 오르는 것도 좋지만 한 바퀴 도는 것도 산을 아는 방법이다. 지금까지 크메르 문자에 담긴 흔적을 따라 돌고 돌아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고 마침내 기행의 끝이 보인다. 


인도에서 태어나 크메르 땅에서 독창성을 키워 자란 크메르 문자는 어느덧 주변 문자들을 독립해 보낼 정도로 성장했다. 인생의 전성기를 지나 지켜갈 신념을 붙들고 외세를 이겨냈지만, 크메르루주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이제 새로이 등장한 디지털 매체를 마주하며 역할을 다하고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생명력으로 싹을 틔울 것인가. 크메르 문자는 지금 갈림길에 서있다. 


압사라 춤 워크숍에서 열매가 땅에 떨어져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지듯, 그리고 순환하는 크메르 세계관처럼 끝에 다다른 줄 알았던 크메르 문자 기행은 산을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래도록 생명을 이어온 크메르 문자는 이제 어떤 길로 가게 될까. 


(크메르 문자 기행은 이번 편으로 마칩니다. 다음 편에는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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