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메르 폰트의 아버지 단홍 씨
캄보디아 문자를 연구한다는 소개를 하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 두 가지가 있다.
"캄보디아에도 문자가 있어요?"
"캄보디아에서도 폰트를 쓰나요?"
이런 질문을 반복해 듣다 보니 캄보디아는 사람들에게 생소함을 넘어 그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크메르 문자 이야기를 꺼내놓으면 흥미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어 위로가 된다.
캄보디아에도 문자가 있고, 폰트도 많아요!
캄보디아 거리를 걷다 보면 정말 다양한 글꼴을 만나게 된다. 크메르 문자는 현대에 이르러 전통적인 철필식 필기법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흔히 고딕체라 부르는 산세리프(san-serif) 계열부터 손글씨, 매우 오래된 캘리그래피 형식까지 다채로운 모양을 보인다. 다양한 크메르 폰트는 형태와 쓰임에 따라 크게 네 분류로 구분할 수 있다.
1. 서 있는 꼴(standing style)
대부분의 현대적인 크메르어 서체가 이 꼴에 해당한다. 워드 프로세서와 기타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서 있는 꼴을 기울인 꼴로 나타낼 수 있다.
2. 기울인 꼴(slanted or oblique style)
손글씨에서 발생해 책이나 문서의 본문에 주로 쓰이는 글꼴이다. 영어와 달리, 기울어진 글자는 강조나 인용과 같은 문법적 차이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3. 둥근 꼴(rounding style)
캘리그래피 스타일. 문서나 책, 화폐 또는 간판 등에서 주로 제목이나 헤드라인으로 쓰인다. 한 때는 왕족 이름을 강조하기 위해 둥근 꼴이 쓰이기도 했다.
4. 필사 꼴(manuscript style)
팜잎책 사스트라에 철필로 적은 글자와 비슷한 형태이다.
이와 같은 네 분류를 나누는 이유는 위 그림처럼 같은 자음이더라도 분류에 따라 글자 형태가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기본으로 외워야 하는 글자 수가 100자를 넘는 것에 더해 글꼴별 다른 모양을 외워야 하기에, 크메르 문자는 외국인들이 배우기에 난이도가 높다.
특징이 뚜렷한 크메르 폰트들을 네 가지 분류법에 따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처럼 다양한 폰트 이외에도 캄보디아에서 오늘날 사용되는 폰트는 굉장히 많다. 누가 이 다양한 폰트를 만들었을까?
크메르 폰트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면서 굉장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운로드할 수 있는 수많은 크메르 폰트의 제작자에 대부분 똑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단홍(Danh hong). 업로드한 사람의 이름일까? 이렇게 많은 폰트를 한 사람이 만들었다니,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 그러던 중에 전 세계 다양한 문자가 웹에서 잘 읽히도록 서비스하는 구글 웹폰트(Google web font)의 크메르 폰트에 적혀 있는 이름을 발견했다. 이번에도 역시 단홍. 만나고 싶어 졌다.
인터넷에서 그의 메일 주소를 찾아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프놈펜 출장길에 그와 드디어 만날 수 있었다.
https://fonts.google.com/?subset=khmer
프놈펜 한 카페에서 단홍 씨를 만났다. 그는 성인이 되기까지 베트남에서 나고 자란 캄보디아인으로, 2000년에 캄보디아에 들어왔다. 그는 원래 디자인과 전혀 상관없는 법학도였다. 학창 시절부터 베트남어를 크메르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는데, 그 당시 크메르 폰트의 리가처(ligature, 합자) 형태가 좋지 않아 글을 쓰기에 너무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폰트를 만들기로 하고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를 독학하면서 6개월 만에 폰트를 만들게 되었다. 그의 프로젝트 중 가장 중요한 일이라면 유니코드(Unicode) 시스템을 적용한 크메르 폰트를 개발한 것이다. 국제 표준에 맞춘 유니코드 시스템 적용 이후로 크메르 문자는 캄보디아뿐 아니라 더 넓은 세상과 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그가 꾸준히 만든 폰트가 벌써 100개도 넘는다고 한다. 가히 캄보디아 폰트의 아버지라 불릴만한 이력이다. 캄보디아에 컴퓨터가 보급되던 시기에 그가 닦은 기초 위에서 지금은 수많은 크메르 폰트가 만들어지고 있다.
100개도 넘는 그의 폰트 중에 가장 좋아하는 폰트는 무엇일까?
"저는 보코르(Bokor) 폰트를 제일 좋아해요. 오래전에 보코르 지역에서 어떤 레터링(Lettering)을 봤는데요, 누가 쓴지는 모르지만 그 형태가 매우 좋아서 사진을 찍었어요. 그 레터링을 기초로 만들어서 이름을 보코르로 지었어요."
좋은 크메르 폰트를 만드는 그만의 규칙이 있을까? 단홍 씨는 몇 가지 규칙을 알려 주었다.
"첫째, 크메르 폰트를 만들 땐 필기법을 따르는 게 가장 중요한 규칙입니다. 외국인 디자이너들이 폰트를 만들면 어색해요. 그들은 필기법을 모르기 때문이죠. 태국이나 다른 문자와는 또 다른 크메르 문자만의 규칙이 필기법에 담겨 있습니다.
둘째, 크메르 문자는 기준선이 네 줄이에요.
세 번째, 글자 사이는 글자 폭과 같은 너비로 벌리는 게 정석이예요.
네 번째, 글자를 구분해주는 고리들은 큼지막하게 그립니다. 글자를 작게 인쇄할 때 판독이 어려워지지 않게요.
마지막으로, 유니트(Unit)를 잘 이해하는 게 중요해요. 글자가 각각 몇 칸에 들어가는지 비율을 잘 맞춰야 좋은 폰트가 됩니다.
아, 그리고 머리카락은 글꼴의 영혼(soul)과도 같습니다. 제가 가장 신경 써서 디자인하는 부분이에요."
20여 년을 폰트 디자이너로 살면서 아쉬웠던 점은 없는지 물었다.
"아쉬운 점은 예전에 저는 폰트를 만들면서 그것으로 돈을 벌 생각을 안 했다는 거예요. 그땐 폰트 종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다양성을 높이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었던 것 같네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캄보디아에는 지금도 폰트를 사고파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제 세상이 많이 바뀌었고, 젊은 폰트 디자이너들도 잘 만든 폰트로 수익을 내는 시장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젊은 크메르 폰트 디자이너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궁금했다.
"타이포그래피나 그래픽 디자인 분야를 많이 배워야 해요. 크메르 문자가 다른 문자, 특히 라틴알파벳과 어떻게 다른지, 또 조화로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예전에 방콕에 갔을 때 보니 태국에는 다른 언어와 조화를 이루는 좋은 폰트가 많더라고요. 앞으로 캄보디아에도 타이포그래피를 충분히 이해하는 폰트 디자이너가 나올 거라 믿어요."
단홍 씨를 만난 지도 벌써 2년이 흘렀다. 그동안 텝 소비쳇(Tep Sovichet) 씨를 비롯한 젊은 디자이너 사이에서 폰트 시장을 만드는 시도가 생기고 있다. 오랜만에 들어가본 크메르 폰트 아카이브 사이트(www.khmerfonts.info)에는 더 많은 디자이너들이 새롭고 다양한 폰트를 선보이고 있었다.
한때 바람 앞의 불 신세였던 크메르 문자가 이제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며 더디지만 조금씩 앞으로, 앞으로 움직이고 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