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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용 시뭔SiMone Apr 18. 2023

"저렇듯 비싼데 왜 사는거지?"

콩트

지난 여름 휴가로 일본 나가노의 사또꼬씨댁을 방문했다. 돌아 오는 길에 막내 아들이 원하는대로 잠시 아끼하바라를 찾았다. 잘 알다시피 동경의 아키하바라는 세계적인 전자 제품의 집산지로 유명하다.

여기 전철역에서 남쪽으로 십분 쯤 내려가면 더 이상 전자상가는 보이지 않고 일반 사무실이 입주한 건물이 들어선 구간이있다. 그곳에 막내가 미리 검색해 놓은 오피스 빌딩 4층으로 올라갔다.



'4 e イヤホン 秋葉原店'이란 상호가 다른 층 사무실 이름과 함께 빌딩 현관에 조막만하게 붙어 있다. 일요일 오후라 그런지 건물 자체에는 사람들 왕래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런데 4층 숍에 들어서니 그야말로 발디딜 틈조차 없이 손님들로 꽉 차있다.

전문적으로 이어폰만 파는 매장인데 크기가 100여평도 넘어 보였다. 대부분이 2,30대 남자들로 이어폰을 만져보고 또 만져보고 들어보고 또 들어보느라 여념이 없다. 그 수많은 물품을 모두 다 섭렵하려는듯 자기 세계를 탐색하는데만 열중한다.




아들이 자기가 고른 이어폰에 심취한 사이에 나는 이곳 저곳을 기웃거린다. 상품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 하릴없이 가격표만 눈여겨 보다가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비행기에서 공짜로 나누어 주거나 인터넷에서 사더라도 기껏해야 2,3만원이면 고급품이 아닐까하고 이제껏 알아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느 하나에 439,776원짜리 가격표가 붙었다. 세상에 44만원이나 하는 이어폰이 있다니! 자세히 들여다보니 상품명이  '64 Audio Tia Fourte'이다. 그렇다고 주위 이어폰에 비해 대접을 받으며 진열되지도 않았다. 녹색 바탕에 주황색 고무로 테두리가 있어 타 이어폰과는 좀 달라보인다. 먼저 가격표를 보았기에 유심히 보았지 고급스럽다기 보다는 오히려 싼티가 줄줄 흐른다. 아무튼 4만원이라면 몰라도 40만원을 주고 살 사람은 온 천지에 없지 싶었다.


"저렇듯 비싼 이어폰을 누가 왜 사는거지? 헤드폰이라면 혹시 모르겠으나..."

나리타 공항으로 가야 할 시간이 임박했기에 아이를 채근해 점포를 나오며 물어 본다.

"응,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다 보면 어느 순간에 어떤 기종이 확 꽂힐 때가 있어요. 저 사람들은 바로 그 경험을 내내 못잊어 찾아 헤메지요."

아들은 빈손으로 빠져나와 무척이나 아쉬운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데도 뒤를 힐끔 돌아다 보며 대답한다.



와인도 그렇다.

어느 순간에 어떤 품종이 팍 꽂힐 때가 있다. '까베르네 쇼비뇽은 신이 창조했고 피노누아는 악마가 만들었다'는 전설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 못할 시점에 다다른 것이다. 묵직하고 떫은 와인에 식상할 즈음 비로소 사로잡히는 버섯향이 오묘한 흙의 세계다. 섬세한 탄닌과 단단한 산도에 어울리는 풍성한 과일 풍미와 부드러운 단내음이 균형을 잡아 오랜동안 입안 가득 맴도는 시간을 만난 탓이다. 그토록 기품있고 우아한 관능미로 혓바닥에 벨벳을 깔아 주던 느낌을 잊지 못해 허덕일 시기가 도래하는 법이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대로 모든 상황은 변하게 마련이다. 그처럼 매혹적인 순간이 똑같이 다시 찾아오기는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그런 유혹에 얼마든지 더 홀리고 자빠지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심장에 크게 무리가 갈까봐 이제서야 살짝 밝힌다. 내가 가게에서 본 그 이어폰의 가격은 ₩439,776가 아니고 ¥439,776이었다. 우리 돈으로 무려 4,50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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