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휴가로 일본 나가노의 사또꼬씨댁을 방문했다. 돌아 오는 길에 막내 아들이 원하는대로 잠시 아끼하바라를 찾았다. 잘 알다시피 동경의 아키하바라는 세계적인 전자 제품의 집산지로 유명하다.
여기 전철역에서 남쪽으로 십분 쯤 내려가면 더 이상 전자상가는 보이지 않고 일반 사무실이 입주한 건물이 들어선 구간이있다. 그곳에 막내가 미리 검색해 놓은 오피스 빌딩 4층으로 올라갔다.
'4 e イヤホン 秋葉原店'이란 상호가 다른 층 사무실 이름과 함께 빌딩 현관에 조막만하게 붙어 있다. 일요일 오후라 그런지 건물 자체에는 사람들 왕래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런데 4층 숍에 들어서니 그야말로 발디딜 틈조차 없이 손님들로 꽉 차있다.
전문적으로 이어폰만 파는 매장인데 크기가 100여평도 넘어 보였다. 대부분이 2,30대 남자들로 이어폰을 만져보고 또 만져보고 들어보고 또 들어보느라 여념이 없다. 그 수많은 물품을 모두 다 섭렵하려는듯 자기 세계를 탐색하는데만 열중한다.
와인도 그렇다.
어느 순간에 어떤 품종이 팍 꽂힐 때가 있다. '까베르네 쇼비뇽은 신이 창조했고 피노누아는 악마가 만들었다'는 전설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 못할 시점에 다다른 것이다. 묵직하고 떫은 와인에 식상할 즈음 비로소 사로잡히는버섯향이 오묘한 흙의세계다. 섬세한 탄닌과 단단한 산도에 어울리는 풍성한 과일 풍미와 부드러운 단내음이 균형을 잡아 오랜동안 입안 가득 맴도는 시간을 만난 탓이다. 그토록 기품있고 우아한 관능미로 혓바닥에 벨벳을 깔아 주던 느낌을 잊지 못해 허덕일 시기가 도래하는 법이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대로 모든 상황은 변하게 마련이다. 그처럼 매혹적인 순간이 똑같이 다시 찾아오기는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그런 유혹에 얼마든지 더 홀리고 자빠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