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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용 시뭔SiMone Apr 28. 2023

주인공은 라뚜르 공작公爵이 아니고.

술 이야기


나와 가장 많은 해외 와이너리 투어를 했던 박총朴總-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음료에 관련한 대학을 설립하여 총장님이 되실 그녀를 우리는 그렇게 부른다.-이 모처럼 와인 시음회를 주선했다. 장소가 순천으로 좀 멀긴 하였지만 시간대가 토요일 밤이라 망설임없이 내려갔다. 토요일 저녁 무료한 나에게 놀거리를 주는 것 자체가 적선積善이며 복 받을 일이기는하다. 

카페 씨에떼

시음장소는 순천의 새 시가지에서 성업 중인 '카페 씨에떼'. 스페인어로 7을 지칭하는 '씨에떼'는 박총이 브랜드화시킨 멋진 커피숍이다. 허나 시음장이 식당이 아닌 관계로 특별히 요리사를 초청하여 대한민국 생태 수도 순천 하늘아래에서 청정하게 자란 쇠고기로 저녁 식사를 마련하였단다. 주최자의 성의는 가히 높디높고 맑디 맑은 순천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날 시음회의 주빈主賓은 멀리 프랑스 보르도에서 왕림하신 '샤토 라뚜르 공작公爵'- Chateau Latour 1997이다. 1855년 라뚜르 가문은 보르도 그랑크뤼 다섯 등급 중에서 최고등급인 1등급을 받아냈으니 작위를 받은 귀하신 몸들 중에서도 VIP라 하겠다. 당시에 매겨진 와인 등급을 서양의 다섯 작위 공, 후, 백, 자, 남(公侯伯子男)에 대입시켜 1등급은 공작, 2등급은 후작. 3 등급은 백작이라 가히 칭할만하다. 작위라는 것이 평범한 사람을 대단한 인물로 추켜세워 준다고 아랫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나 말을 안 할 뿐이다. 


Chateau Latour 1997

생각과는 달리 Second Wife로 Les Fortes de Latour을 대동하고 나타나신 공작님의 차림새는 오히려 검소했다. 중세 영국과 불란서 백년전쟁 시 자기 밭의 포도밭에 건축했던 탑을 그려 넣은 라벨처럼 소박한 단색의 옷을 입고 있다. 그래도 역시 진골 동네 포이약에서 자란 귀족이라 매무새부터 기품이 뿜어져 나온다고 시음자 모두들 찬탄하여 마지않는다. 공작이 태어난 1997년의 보르도 그 마을은 태평했을지 몰라도 이곳 한국에서는 IMF를 만나 97 숫자만 들어도 경끼를 일으킬만했다. 그런데도 역시 상대가 공작 신분이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시음장에는 칭찬과 아첨만이 온통 난무한다. 교황을 뵈러 온 가톨릭 신자처럼 라뚜르 공작과 사진을 찍어 알리기에 바쁘고 잔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려 경배를 드리기에도 열중한다. 이처럼 모두들 칭송과 아부로 춤을 추었다만 나는 오히려 불경스럽게 오늘 시음기試飮記의 주인공을 프랑스 공작 대신 스코틀랜드 터프가이로 삼으려 한다. 



'발가벗은 임금님'의 공식 행차가 끝나고 참석자 대부분이 자리를 떴을 때 주최 측이 혈액 내 알코올 농도를 평상시처럼 유지시켜 주기 위해 나에게 제공한 위스키가 진짜 주인공이다. 

더블 샷 잔에 가득 담긴 노란색 액체는 금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밝고 오렌지 껍질 색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하다. 그럼 어디서 만나 봤을까 저 컬러를... 한참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청주 나의 집 앞의 과일 가게를 생각해 낸다. 가게 전면 도로에 잘 닦아 내어 번쩍거리는 질 좋은 성주 참외의 색과 향이었다. 스코틀랜드 위스키에서 경상도 참외 향이라니... 나도 어지간히 구라가 늘었나 보다.


바로 그 주인공의 이름은 '탈리스커 25년 Talisker 25 years old' (병입:2004년, 도수:57.8%, Cask Strength)이다. 

녀석은 소문에 알려진 바와 달리 그다지 터프하지 않다. 조니워커의 블렌딩에 주로 사용되는 몰트위스키라는 이미지는 이 녀석을 훌리건의 아류라고 짐작하게끔 만들기 쉽다. 그러나 태어나서부터 한창 젊음이 끓어오를 때까지 25년을 스코틀랜드 골방에서 숨어 지낸 터라 성질은 많이 죽어 있다. 몸속에 유전자로 저장된 피트 peat향이 많이 가라앉아 있다는 말이다. 첫 대면에서 피트의 잽을 내 턱에 가볍게 던지고 나서 이내 뒤로 물러서니 알싸한 오렌지 향에 입안이 얼얼하다. 마지막 피니시에서 다시 스모키 향이 천천히 코로 향하며 내내 계속된다. 내면의 풍부함에 따라 처음엔 가벼운 듯 여겨지다가 목 넘김에 가서야 중후함의 진가를 보여 주는 녀석이다. 지금까지 접해 본 터프 가이 중에서 꽤 착한 친구임에 틀림없으니 여러분도 한번 만나 사귀어 보시기 바란다. 

이 녀석의 고향은 스카이 Skye로 스코틀랜드 서북쪽에 자리 잡은 섬이다. 글라스고에서 자동차로 5시간 넘게 걸리는 오지이다. 'Talisker'는 기울어진 바위 sloping rock라는 뜻이란다. 이 섬에는 예전에 아일라섬과 맞먹는 7개의 증류소가 있었지만 거의 문을 닫고 이젠 탈리스커만이 유일하게 지키고 있다. 



혼자만 살아남아 그대로 잘 나간다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스피릿 상식 한 가지>

'카스크 스트렝스 Cask Strength'.

원액을 물로 희석하지 않고 나무통에서 바로 병에 담은 위스키로 도수가 매우 높다.

일반 위스키는 병에 담기 전에 물로 희석하여 알코올 도수를 40~43% abv로 낮추는데 반해 이것은 60도에 육박한다. 

컬트와인처럼 마니아층이 형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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