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
"남는 건 사진밖에 없어."
여행을 하면 가장 많이 하게 되는 일이라 하면?
바로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일일 것이다.
순간을 기록하여 추억의 수명을 늘려주는 고마운 존재.가끔씩 사진첩을 열어 멋지게 찍힌 풍경사진이나친구들과 장난하고 있는 동영상을 보고 또 보며
여행에서의 그날을 떠올리고 그리워한다.
나 또한 여행지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남기곤 한다.혹은 핸드폰 메모장에 인상적인부분을 기록하거나 내 생각을 남겨놓기도 한다.
미래의 나를 과거로 데려다 줄거라 굳게 믿으며.
프랑스 보르도에서 마지막날, 나는 사진이나 동영상아닌 새로운 무언가와 맞딱 드렸다.
그것은 여행이 끝나고 두 달 뒤, 이 글을 계획하고 있던 나를 단숨에 그 자리에 그 시간에 여행지로 데려갔다. 흡사 타임머신 같았던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2023년 10월 13일,
숙소에서 1번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달려 이름이 낯선 정류장에 내렸다. 지도가 알려주는 방향으로 10분 정도를 걸어갔다.
그리고 보르도 대성당에 도착했다.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파리의 노트르담 대 성당 같은 기대가 프랑스 남부에 있는 소도시 성당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성당은 그런 얕은 식견에 내 예상을 절제미의 절정을 이룬 자신의 아름다움과위엄있는 자태로 비웃었다.
몇천 톤의 황금빛 도금 장식이나 은으로 만든 촛대들 르네상스 시대 유명하다는 화가는 다 데려다가 그려놓은 천장화나 벽화는 없었지만 완벽하게 들어오는 자연광과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장식이
공간 안에 있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그렇지만 감탄하게 만들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빛, 목재로 만든 의자, 재단 그리고 오르간, 단조로울 만하면 나오는 스테인드글라스
,적은 방문객수, 조용하고 성스러운 공간, 이 모든것들이 합쳐져 그날의 아침과 성당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모두 완벽하게 느껴졌다.
한 시간쯤 아니 어쩌면 조금 더 구석구석 거닐며 카메라의 눈을 통해 사진으로 담고, 마음과 오감을 통해 온전한 나의 눈으로도 담는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니 완벽한 가을 날씨가 나를 반긴다. 사람들이 일 년 내내 딱 이 정도 날씨면 좋겠다고 흔히 말하는 그런 날씨.
덥지도 춥지도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다.
새파란 하늘과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당신이 머릿속으로 그린 그 풍경 그대로다.
성당으로 오는 길에 우연히 본 버섯모양의 케이크와
커피 한잔을 먹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또다시 실내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 아까웠다.
나는 성당 앞에 놓인 검정 대리석 벤치에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았다.
아래서 올려다본 성당은 마치 아기가 엄마의 턱을 바라보는 모양새였다.
여느 때와 같이 사진이나 동영상 메모장을 켜서 생각과 감상을 글로 남겨도 되는데 내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음성메모'라는 어플을 실행시켰다.
내 손가락과는 다르게 창피함을 아는 내 뇌는 수치심을 느꼈다.
이게 무슨 90년대 드라마 여주인공 같은 짓이야.
사연 있는 장소에서 괜히 센티해져서 녹음기에 대고오글거리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는 그런 여주.
하지만 대리수치를 느끼는 뇌와는 다르게
입은 손가락과 동맹이라도 맺었는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2023년 10월 13일 나는 지금 보르도 대성당 앞에 앉아있어. 옆에서 색소폰 할아버지가 연주를 하신다
이 날씨에 눈앞에 몇 백 년 된 성당과 함께 색소폰 연주라니 황홀할 정도로 기분이 좋다.
100마리나 넘는 비둘기들이 100년이나 넘은 성당 조각 여기저기 위에 앉아있다.
눈치 챙겨라 이거 유네스코 지정 유산이다.
나중에 이걸 들을지 말지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이 오글거림을 듣게 된다면 이왕 들은 거 이거 하나만 꼭 기억해. 이 날 너는 정말 환상적인 날씨에 정말 아름다운 건물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는 사실을"
물론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오글거리지만 그나마 제정신을 차리고 있던 뇌의 통제 덕분에 입과 손가락이 이 정도에서 마무리한 듯했다.
두 달뒤, 오늘 이 글을 쓰기 위해 저 날의 음성메모를들어봤다.
생각보다 덤덤하게 상황 묘사를 하고 있고 심한 감정적 호소나 미사여구가 가득한 저세상 감상이 기록되진 않아서 생각보다 듣기 거북스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그냥 색소폰 할아버지가 연주를 했어가 아니라
진짜 그의 연주가 녹음 되어 있어서
나의 덤덤한 목소리 뒤로 바람소리와 트램소리가
BGM처럼 깔려 있어서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조금 더 소리들의 집중하기 위해.
음성메모에 담긴 여러 가지의 소리들을 하나씩 찾을때마다 노래에 담긴 여러가지의 악기들을 찾아내는 것처럼 희열이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그날의 그 시간을 더욱더 선명하게 보여줬다.
단숨에 나를 성당 앞 벤치로 데려갔다.
45일 여행기간 동안 음성메모는 이 하나가 전부인 것이 종이에 베인 살처럼 뭉근하고 따갑게느껴졌다.아쉽다는 말로 깊이와 양이 담기지 않을 만큼 아쉬웠다.
45일을 평생의 시간이라 비유한다면 내 평생 동안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하는 나의 시간은 채 며칠이 안 되겠지 주어진 시간을 다 쓰고 돌아봤을 때 이번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후회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훗날 절절하게 그리울 이 순간들을 보이지 않는 것들로 기록해 보면 어떨까?
특별한 소리가 아니어도 좋다.
아주 일상적인 소리들 말이다.
카페에서 커피를 만드는 소리, 책장을 넘기는 소리,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도 좋다.
엄마가 부엌에서 음식 하는 소리, 찌개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 설거지하는 소리도
우리 아이가 옹알이하는 소리, 처음 엄마라고 말하는 소리, 사랑한다 말하는 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외치고 있는 소리를 눈을 감고 들어보자.
온 신경을 집중하여 귀를 기울이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