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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소망 Dec 15. 2023

주저 말고 외치세요. I'm good.

보르도 #1

언어에는 두 개의 다른 뜻을 가진 중의적 표현들이 있다. 예를 들어 힘들다는 친구를 위로할 때 "괜찮아"라고 하고, 친구가 음식을 권하는데 먹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또한 "괜찮아"라는 표현을 쓴다. 전자는 긍정적이고 후자는 거절, 즉 부정적 뉘앙스이다.


영어에도 같은 표현이 있다.

I'm good.

How are you? 같은 안부를 묻는 질문에 "I'm good"이라고 대답한다. 괜찮다, 잘 지낸다 정도의 뜻이다.반면, 누군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권할 때 완곡한 거절의 의미로도 쓰인다. "I'm good" 나는 괜찮아. 난 원하지 않아.


친구나 가족,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하다 보면 분위기상 혹은 상대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내가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먹거나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장소에 가곤 한다. 물론 함께 온 여행이니 최대한 일행들과 상의하에 함께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는 활동들을 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가끔은 내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면 어떨까?


2023년 10월 11일, 나는 파리 몽파르나스역에서 기차를 타고 '작은 파리'라고 불리는 보르도에 도착했다. 마르세유나 니스 같은 남부도시에 가려져 있지만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익숙한 도시일 것이다.

보르도의 와인 말고 유명한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까눌레이다. 프랑스어로 "세로 홈을 판, 주름을 잡은"이란 뜻으로 보르도 지방의 아농시아드수도원에서 18세기 경부터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빡빡했던 파리 일정 때문에 너무 피곤했기에 침대와 한 몸이 되려 했지만... 그렇다, 여자는 밥이 없인 살아도 설탕 없인 못 사나 보다. (물론 나는 밥 없어도 못 산다.)


한국에서도 까눌레는 꽤 자주 먹었기에 큰 기대감 없이 한 입 크게 깨물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데 럼주가 들어가서 그런지 술빵 냄새가 확 올라왔다. 한국에서 먹었을 때보다 놀랍도록 더 촉촉했고 더 향긋했다. 클래식뿐만 아니라 초콜릿, 캐러멜, 로쉐등 다양한 맛도 주문했다. 그중에서도 진득한 캐러멜 코팅이 입안을 화려하게 만드는 캐러멜 맛이기대 이상이었다.


친구들과 셋이서 까눌레만 12개를 먹었다. 당을 과도하게 섭취하니 기분이 과도하게 좋아졌다.

이 좋은 기분을 가지고 어디든 가야 하는데 정해놓은 곳이 없었다. 보르도는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길에 경유지처럼 가볍게 들린 도시였기에 짜놓은 일정이라곤 까눌레 먹기와 노을 질 녘쯤 와인 박물관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구글맵을 열어 근처에 뭐가 있나 찾아보니 Jardin Public이라는 시민공원이 있었다.

날씨도 좋고 배도 부르고 설탕에 취했고 딱히 관광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니 한적하게 공원에서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도 하고 (해외에서 사는 친구들이기에 코로나 이후 약 3년 만에 만났다) 산책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가까운 곳에 공원이 있다 제안하니 친구들이 흔쾌히 가자고 했다.

공원은 정말 푸르고 아름다웠다. 10월이란 이름과 맞지 않게 한여름인 8월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파리 관광지의 소음, 공기의 지쳤던 내 귀와 코가 극강의 피톤치드와 잔잔한 새소리에 의해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공원에 온 지 채 5분도 되지 않았을 때 친구들이 말했다. "이제 어디 가지?"

다른 나라의 공원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고 사색을 즐기는 것도 모두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나

공원 가기로 해서 공원에 도착하면 다음 미션을 하러 떠나야 하는 극강의 효율성을 자랑하는 친구들.


내가 친구들을 잘 안다고 착각했구나. 나와 성향이 비슷하다고 잘못 알고 있었구나.

우리는 취향이 너무 달랐다.


한 친구가 수산물 시장에 가자고 제안했다. 옆 친구도 그러자 한다. 사실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공원에서 책도 보고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같이 온 여행이기에 차마 안 간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시장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20분 정도 걸려 도착한 시장은 생각보다 너무 작았고 이미 문을 닫은 가게도 많아 볼거리가 없었다.

친구가 다시 유명한 맛집이 있다고 거길 가자 제안해서 이번에도 따라나섰다.

20분 정도 걸어 도착한 맛집은 오늘 예약이 모두 마감되었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친구가 다시 2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처음 출발한 곳으로 돌아가 포장을 전문으로 하는 케밥 맛집에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케밥보다는 연어가 들어간 롤을 먹고 싶었지만 친구들에게 최대한 맞추고자 고개를 끄덕이고 뒤따랐다.케밥 가게는 일명 '핫플'인지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기줄이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기대에 찬 표정을 짓고 있고 구매에 성공한 사람들은 인증샷을 찍고 가게 주변에 서서 혹은 광장 계단에 앉아서 케밥을 먹고 있었다.


그때였다.

머리가 너무 아프고 소화가 안 되는 느낌이 들었다.

케밥은커녕 연어롤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한적한 곳에 앉아서 좀 쉬고 싶을 뿐이었다.

"이상하다. 아침만 해도 컨디션이 좋았는데."

친구들한테 속이 안 좋아서 케밥을 못 먹겠다 얘기할까 하다 미안한 마음에 몇 번을 고민하고 망설였다. 대기줄은 쉽사리 줄지 않았고 머리는 점점 더 아팠다. 잠시뒤 나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나... 너무 머리가 아프고 속이 안 좋아. 어디 카페라도 가서 콜라 한 잔 마시고 있을게."


일단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앉자!

바쁜 걸음을 옮겨 인적이 상대적으로 드문 곳으로 가는데 서점이 보였다. 내 입에서 육성으로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휴. 다행이다." 나는 서점에 뛰어들듯 몸을 던졌다. 서점은 생각보다 꽤 넓었는데 직원 두 명만이 책을 진열하고 있었다. 나는 답답했던 숨을 크게 한 번 고르고 책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점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머리도 아프지가 않다. 온통 불어로 적혀 읽을 수도 없는 책들인데... 이렇게 머리가 개운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보여 반가웠다. 처음 보는 프랑스책들은 번역기를 이용해 한국어로 제목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도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나는 "동화책 추천 해주세요. 프랑스 어린이가 모두 읽는 책이면 좋겠어요."을 불어로 번역한 핸드폰 화면을 직원에게 보여줬다.

점원 언니는 두 번째 줄 오른쪽 사진에 보이는 쥐 그림이 그려진 책을 추천해 주었다. 영화 라따뚜이도 그렇고 프랑스는 쥐가 모든 이야기에 단골 주인공 인가 보다. 그렇게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고 책을 구매해 밖으로 나왔다.

"머리도 안 아프고, 속도 괜찮네?"

그제야 알았다.

하고 싶지 않은 걸 억지로 해서 생긴 통증이었단 걸.

세상에 하고 싶지 않은 걸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은 많다. 하지만 난 여행 중이다. 휴식을 취하고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해 16시간을 날아왔다. 이 시간만큼은 하고 싶지 않은 걸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왜 그렇게 참았을까?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기자기한 상점들도 둘러봤다. 장사는 뒷전이고 연주에만 심취해 계신 악보 가게 아저씨. 수백 병의 와인이 도서관처럼 빽빽하게 장을 채우던 곳. 화장품 광고에 나올법한 수제 비누 가게.

기분이 너무 좋다.

그래. 하고 싶은 걸 할래.

기쁘게 여행하고 싶어.


친구들이 어디냐고 연락이 왔다. 버스 정류장에서 친구들을 만나 함께 가기로 했던 와인 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 입장료에는 오디오 가이드도 포함이 되어있었다. 평소에 설명 듣는 걸 매우 좋아하는 나는 오디오 가이드를 항상 이용하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내 발길이 닿는 대로 편하게 보고 싶었다.

입구에서 오디오 가이드 대여를 권하는 직원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I'm good(저는 괜찮아요)라고 얘기했더니 다시 한번 불러서 가져가란다. 친구들도 내게 오디오 가이드를 권한다.

나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I'm GOOOOD (저는 진짜 괜찮아요)


편안한 소파에 누워 천장에서 상영되는 포도가 익어가는 영상을 보고, 수십 개 와인잔이 놓인 테이블에서 5분 동안 장소와 음악이 바뀌는 퍼포먼스도 즐겼다. 코믹스럽게 와인, 글라스, 디켄더, 오프너의 종류를 알려주는 다분할 영상도 깔깔깔 웃으면서 두 번을 봤다. 비스킷, 고무, 오래된 책, 커피콩등 온갖 종류의 냄새를 맡아볼 수 있는 장소에선 내 책에서 나오는 올팩토리(냄새로 기억 회복을 돕는 기계) 실사판을 만난 느낌이었다. 오디오 가이드 없이도 이토록 즐거운걸.


저녁엔 보르도에서 가장 유명한 물의거울로 향했다.친구들이 여기서 사진을 찍으라고 권하지만 나는 그저 물의 거울을 등지고 계단에 앉아 강을 따라 조깅을 하고 유모차를 끌고 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보며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I'm good을 외쳤다.


오해는 없길 바란다. 친구들의 취향은 잘못되었고  내 선택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내 취향이 틀리고 친구들의 선택이 맞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는 그냥 다른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인 집단 안에서 나는 나를 지켜내보기로 했다.  I'm good 한마디로 나와 나의 행복에 가까워진 기분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어쩌면 수많은 시간 동안 분위기 때문에,친구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나만 단독 행동하면 안 되니까 내가 맞추자 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분위기도 맞출 줄 알아야 하고, 다수의 선택이 옳을 수도 있고, 튀는 행동을 안 해야 할 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당신에게 두통과 메스꺼움 같은 고통을 만들고 있다면 한번쯤은 말해보자. 나는 괜찮다고.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당신을 위해,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당신의 기쁨을 위해.

주저하지 말고 외쳐보세요.

I'm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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