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세바스티안 #1
스페인 북부 최고의 미식 도시라 불리는
<산 세바스티안>에 도착했다.
비슷한 시기에 장사천재 백사장 2팀도
촬영을 마치고 갔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제 방송이 나가고 나면 소수에게만 알려졌던
이 동네도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게 될지도 모르겠다.
보르도에서 오전 관광을 하고 오후 3시 20분에 버스를 타고 보르도를 출발하여 저녁 7시 10분에 산 세바스티안에 도착했다. 유럽은 대부분 저녁 식사를 늦게 하기 때문에 이 시간이면 밖으로 나가 세계에서 면적대비 미슐랭식당이 가장 많고 수백 종류의 핀쵸(한 입 거리 안주)와 바스크 지방에 걸맞은 원조 바스크 치즈케이크 등 차고 넘치게 많은 음식들을 맛볼 수 있었지만 체력이 안 받쳐주는 상태였다.
우리는 숙소에서 가까운 산 세바스티안 버스터미널역에 있는 마트에 가서 간단히 맥주 한 캔씩과 쵸리죠(스페인식 소시지) 과자만 겨우 사서 한국에서 가져온 컵라면으로 저녁을 대신하기로 했다.
숙소에 마련된 간이 주방 겸 휴게실에서 옹기종기 앉아 작은 컵라면 하나와 작은 사이즈의 캔맥주, 거기에 간간히 쵸리죠 소시지와 스낵을 겸비하니 그 순간만큼은 여기가 바로 5 스타 미슐랭 식당이었다.
그렇게 저녁 식사가 한창일 무렵, 내 맥주는 금세 바닥을 보였다. 버스에서 화장실 가기가 불편하기에 물을 많이 안 마셔서 그랬는지 어지간히 목이 말랐었나 보다. 칙ㅡ 소리를 내며 맥주 캔을 열자마자 벌컥벌컥 마셔 버렸더니 벌써 동이 난 것이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다시 역사에 있는 슈퍼까지 가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이었다. 아까 어디다 던져 놓은 생수나 찾아서 마셔야겠다 하며 등을 돌려 휴게실을 보는데 이런!! 유레카!!
숙소자체에서 운영하는 자판기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캔맥주가 있었고 아주 시원한 상태였으며 가격도 2유로(3,000) 원 정도로 편리함 비용을 지불하는 것치곤 아주 합리적이었다.
나는 얼른 방에서 카드를 가지고 나와 자판기에 태그를 하고 맥주 한 캔을 뽑았다. 어찌나 시원하고 달콤한지 첫 번째 마신 맥주보다도 더 맛이 있었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하고 짐정리와 샤워를 마친 뒤 바스락바스락 거리는 촉감이 예술인 호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아 이제 좀 살겠군.
나는 여행 내내 총무를 맡고 있었기에 그날그날 공동경비에서 얼만큼씩 썼는지 결제 화면을 어플에서 캡처해 친구들에게 공유하고 내가 개인적으로 쓴 금액도 그날그날 캡처해서 메모장에 기록을 했다.
신발에서 비로소 자유를 얻은 내 두 발과 캐리어와 배낭이라는 짐 더미에서 해방된 내 어깨와 두 손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며 은행 어플을 보던 나는 그만 깜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조금 전 숙소 자판기에서 마신 맥주의 금액이 2유로가 아닌 20유로(30,000)로 빠져나간 것이었다.
이런 황당한 일이 5성급 호텔 미니바도 아니고 뷰만 맛집이라는 스카이라운지에서 마신 것도 아니고
숙소 한편에 있는 미니 자판기에서 350ml짜리 캔 맥주 하나에 3만 원을 태우다니 이건 정말 말이 안 됐다.
당시 프런트 데스크에는 직원 근무 시간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부킹닷컴에 연결되어 있는 메시지창에 이 황당한 사실을 문의했다. 당연히 바로 답변이 올리가 없었다. 영락없이 다음날 아침 직원 출근시간까지 기다려야 했다. 나는 침대에서 혼자 머리로 원맨쇼를 했다.
<그래, 뭐 여행지에서 맥주 한 캔에 3만 원 태울 수 있지. 좋은 데서 마셨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내가 맛있게 먹었고 기분이 좋았잖아? 그럼 된 거지>
<아니 그래도 3만 원은 아니잖아. 500ml짜리도 아니고 피쳐도 아니고 고작 350ml 한 캔이 3만 원? 삼. 만. 원?>
이게 무슨 일인가 여행지에서 고작 맥주 한 캔으로 침대 위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르락 내리며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보낸 나는 아침이 되어 프런트에서 인기척이 들리자마자 데스크로 뛰어 나갔다.
올라~(Hola~) 스페인어로 반갑게 인사하는 직원에게 나 역시 올라~를 반가운 척 시전 한 뒤 바로 상황 설명에 들어갔다. 내 얘기를 들은 직원은 아~ 별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 자판기는 어떤 걸 사도 무조건 20유로를 deposit(디파짓)으로 가져가 그리고 며칠 뒤에 제품 금액을 제하고 너에게 다시 돌려줄 거야."
헐? 그런 법이 어디 있던가.
제멋대로 내 피 같은 20유로를 보증금으로 가져갔다가 며칠 뒤에 돌려준다니.
언제 돌려주는지도 모르냐는 나의 다른 물음에 직원은 은행이 다 때가 되면 돌려준다는 황당한 답변을 했다.
심지어 내일 아침이면 난 이 숙소를 떠나 다른 도시로 이동을 하는데 만약 돌려주지 않으면 다시 따지러 오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유럽인들 특유의 그 어깨 으쓱임을 시전 하며 '다 때가 되면 돌려줄 거야, 아미고(친구야) 별일 아니야.'라고 하는 순수한 스페인사람에게 더 이상 뭐라고 따질 수 있단 말인가. 믿고 기다려 보는 수밖에.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일단 그렇게 마음먹고 난 뒤로 내 머릿속에서 20유로는 금방 잊혔다.
수십 개의 핀쵸바들을 여기저기 유영하며 친구들과 마시고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또 다른 스페인 북부 도시인 빌바오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유럽여행을 하다 보면 트래블월렛이나 트래블로그라는 해외결제카드가 매우 유용하다. 나도 당시 공금과 내 개인자금을 각각 두 카드에 넣고 그때그때 환율에 맞추어 조금씩 환전해서 사용했는데 아무래도 한국은행시간과 현지 유럽에 은행시간 시간 사이에 시차가 존재하다 보니 가끔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결제가 어렵고 한국돈을 유로로 환전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가 있다고 카드사에서 계속 안내문을 보내곤 했다.
나는 며칠 전 환율이 유리할 때 충분히 환전을 해 놓았다 생각하고 그 안내문은 무시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자부하며. 그런데 꼭 일은 그럴 때 터진다. 친구들과 빌바오라는 도시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공금카드로 결제를 하는데 삑! 하며 잔액이 부족하다는 안내를 받았다. 나는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며 잔액을 확인해 보니 정말 잔액이 부족했다. 지난 이틀 동안 미식투어를 하느라 생각보다 식당에서 뭘 엄청나게 사 먹었고 또 방금 식사한 식당이 금액이 조금 높았던 터라 금액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나는 직원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얼른 한국통장에 있는 돈을 유로로 환전하는 것을 시도했는데 에러 알림창이 뜬다. 그렇다. 지난 며칠간 카드사에서 계속 공지했던 날짜. 결제도 안되고 유로화도 안 되는 날. 그게 바로 지금이었던 것이다. 수수료는 나와도 한국에서 쓰는 신용카드로 결제하려고 하려는데 아참. 혹시 분실할까 봐 이중 삼중 사중으로 감싸서 캐리어 가장 안쪽 지퍼에 넣어놨지. 친구들은 모두 내 공금카드만 믿고 다른 여분의 카드가 없었고 다 함께 현금을 모아봐도 금액이 부족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며 발을 동동 구르며 계속한다고 달라질 거 없는 새로고침(창을 아래로 끌어당기는 것)을 하고 있는데.
그때.
자판기가 가져간 보증금 20유로에서 2유로를 빼고 18유로를 돌려준 것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가지고 있던 현금까지 보태어 식사 금액을 결제할 수 있었고 무단취식에 범죄자가 되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목뒤에 땀이 났던지 식당을 나서자 불어온 바람에 뒷목이 서늘했다.
'휴, 다행이다.'
그날 밤, 침대 위에 앉아 일기를 쓰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행운에도 Deposit(보증금)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말이다.
숙소 직원이 했던 말도 떠올랐다.
<다 때가 되면 돌려줘, 아미고(친구!) 별일 아니야>
오늘 때마침 환급금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뭐 사실 친구들을 식당에 잠시 볼모로 잡아두고 내가 숙소에 가서 신용카드를 가져오면 어떻게든 결제는 했을 것이다. 매우 피곤 해졌겠지만.
다행히 때가 되어 행운이 돌아와 줘서 그런 불행은 피했지.
유난히도 지독하게 불운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가?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사실 나의 불운은 20 유로치가 아니고 2 유로치라는것. 그런데 지금 당장은 그 불행의 금액이 엄청 크게 느껴진다는 것.
하지만 보관되어 있던 행운이 때가되어 돌아오면 당신의 불행은 고작 2유로 뿐이었다는 것.
당신의 행운을 잠시 Deposit(보증) 해 두었다 생각해 보시라.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에 그 행복이 돌아와 있을 테니.
당신의 행운을 Deposit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