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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Sep 09. 2021

[정유정 특집] : 완전한 행복

소덕소덕 : 소심한 덕후들의 소소한 덕질 라이프 20화

팟캐스트 20화는 여기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스릴러를 쓰는 여성 작가

이번 주제는 정유정 작가인데요. 저는 7년의 밤으로 정유정 작가를 알게 됐습니다. 스산하게 느껴지는 스릴러를 쉴새 없이 몰아치듯 전개해가서,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은 금세 책에 빠져들고 그 스산함을 즐기게 됩니다. 이런 게 바로 스릴러라는 장르를 읽고, 경험하는 즐거움이겠죠? 저는 이번 주제인 정유정 작가의 가장 최신작인 <완전한 행복>을 골랐지만 내용에 대한 세세한 리뷰보다는 스릴러라는 장르와,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보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는 스릴러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건 제가 쫄보 중에 쫄보이기 때문이죠. 워낙 겁도 많아서, 스릴러 장르의 영화를 한편 보면 얼마간은 길을 걸을 때도, 집에서 쉬고 있을 때도, 순간순간마다 그 이미지가 떠올라 괴로워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많은 미디어에서 스릴러 장르가 많아지고 더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장르가 가진 매력과 흥미진진함, 그 스릴에 빠져들기 때문이겠죠? (저도 오락 정도로 즐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 가끔은 명작으로 꼽는 작품을 스릴러라는 이유로 보지 못할 때에는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저만 그 재미를 못느끼는 것 같아서요.

어쨌든 스릴러라는 건 그를 보고 있는 독자나 청자를 대상으로 긴장감을 유발하는 장르입니다. 정유정 작가가 이런 스릴러를 쓰는 여성 작가라는 점에서 김은희 작가가 연관되어 떠올랐어요. 보통 범죄 장르의 피해자가 여성임을 감안했을 때 이런 여성 창작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 또한 그들의 작품들이 흥행하고 있다는 점은 유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유의미함을 넘어서 그래서 그다음은 어떤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봐야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제 단순히 흥행 자체가 목표이기보다, 어떻게 더 유의미하게 창작하고 그를 흥행시키고 주류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단순히 독자이기에, 그리고 단순히 한 명의 관객, 청자이기 때문에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해요. 이 지점에 대해서는 뒤에서도 추가로 언급하겠습니다.


행복은 더하기일까, 빼기일까?

앞서 제가 선택한 책의 제목이 <완전한 행복>이었죠. 이 책에는 예의 다른 작품들에서 나타난 것처럼 누군가 죽고, 누군가 의심됩니다. 하지만 그 의심은 금방 선명해집니다. 읽는 독자들은 금방 아 저 사람이 범인이구나, 저 사람이 죽인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야기는 급박하게 흘러갑니다. 박진감 있는 전개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페이지를 끊임없이 넘길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마주한 한 인물의 말이 있습니다. 이 대사가 이 책 전체에서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거였구나, 그래서 그 인물이 그런 선택과 행동을 한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건 책의 제목과도 연결되죠. 저는 처음에 사람이 죽고, 그 살인을 좇아가는 과정이 담긴 이 책의 제목이 왜 <완전한 행복>일까 하는 의문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 대사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자가 담고자 한 제목의 의미가 다가왔습니다.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결국 그 인물이 그런 행동을 했던 건, 모두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자신이 마주한 불행의 가능성을 없앤 것이었다는 겁니다. 저자는 인간의 나르시즘을 이 인물을 통해 표현했다고 했는데요. 고상한 말로는 그렇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결국 저는 '지밖에 모르는 인간'의 극한을 그 인물을 통해 봤던 것 같아요.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런 선택을 망설임 없이 해내가는 것, 그것 자체가 보여주는 반사회성과 자기중심성에 저는 마음이 울렁거렸습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어떻게, 또 어느 정도로 표출되느냐의 정도만 다를 뿐 모두 가지고 있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바라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행복은 뺄셈이라 말하며 불행의 가능성을 망설임 없이 제해가는 인물의 모습을 보며, 그 제해가는 방법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과 배타성, 그리고 결국 어떤 모습을 취하게 되는지에 대한 모습까지 우리는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는 살인을 저지른 인물의 시점으로는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습니다. 철저히 주변 인물들의 시점으로만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렇기에 그 인물이 정말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저는 그것이 만드는 공포감도 한몫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할 수 없기에 어떤 행동을 할 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게 되는 거죠.


실제 사건을 새로운 이야기로 만드는 것

사실 이 책을 읽다보면 한 가지 실제 사건을 떠올리게 됩니다. 바로 전남편을 살인한, 고유정 사건입니다. 저는 이렇게 실제 사건을 선명하게 떠올리게 만드는 창작물에 대해서 사실 반감 아닌 반감이 있습니다. 반감이라는 게 조금 공격적인 단어일까요? 그럼 좀 순화한 말로 표현하면,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오지랖이 넓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불행한 사건이고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을 이렇게 작품으로 창작해 많은 이들에게 상영하고, 읽히게 된다는 것은 또다른 폭력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를 창작해내는 과정에서 왜곡되거나 의도되었든 되지 않았든 2차적인 가해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그 영화가 나오는 것이 피해자를 위해서, 잡히지 않은 범인이 있다면 사회적으로 공론화를 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의미가 없는 창작물이라면 저는 그 이야기를 마냥 나의 오락으로 삼을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표가 있고, 그 물음표는 아직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맥락의 일이 한 영화가 개봉할 즈음 있었죠. 바로 영화 <암수살인>인데요. 이때 피해자 가족이 상영 금지 가처분신청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화를 제작하는 데에 동의한 적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죠.

이처럼 저는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이야기로 재창작할 때는 보다 더 주의깊게, 섬세하게 접근하며 일어날 수 있는 2차적 가해에 대해 조심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고통을 받은 그 폭력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것도 저는 추가적인 가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를 또 누군가 소비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포르노적으로 전시했다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거든요. 그렇기에 제작 과정에서 피해자, 그리고 그 가족에게 동의를 받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피해자들을 존중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고요.

그런 점에서 저는 한국에서 이런 실화 기반의 이야기들이 창작될 때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가 제대로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깨어 있는 창작자들의 작품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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