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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Oct 27. 2016

4.『부활』

삶을 살아간다는 것 下 -  다시 태어나 진정 새롭게 살아가는  것

자신의 연약함에 눈물지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삶을 살아가며 어느 순간은, 이 고달픈 이야기에서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아마도 나의 모습이 너무나 버겁고, 추악하고, 슬프기에 도망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족함을 보면 볼수록 희망이 없고, 살아갈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삶이 두렵고 버거운 마음 밖엔 없습니다. 그렇게 다른 어떤 때가 아닌 고달프고 자신의 어그러짐을 인지했을 때에 비로소 삶의 무거움을 깊숙하게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내가 살아가고 있구나, 하면서요.  

어디 저 자신의 문제뿐일까요. 세상사 모든 것들이 부조리하게 보입니다. 나 자신이 어그러져 있는 것처럼 너무나 비슷한 어그러진 모양이 세상 곳곳에 녹아 있습니다. 더욱 저를 두렵게 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스며들어 있는, 부조리의 ‘당당함’이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 당연함에 휩쓸리는 것이요. 그리고 지금도 순간, 순간 두려움이 엄습해옵니다. 당연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익숙해져 버려, 그 흐름에 따라서 살아갈 것 같아서요. 그렇게 당연하지 않은 부조리와 어그러짐 가운데에서, 어그러진 모양대로 살아가지는 않을까 두려워서요.

이처럼 자신이, 공동체가, 가정이, 사회와 국가가 모두 어그러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희망이 없어 보이기에, 두렵고 절망적입니다. 이런 모양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럴 때일수록 ‘정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옳고 옳지 않음. 바르고 바르지 않음. 온전함과 어그러짐. 그 사이에서 우리는 헤매고 있습니다. 아니, 헤매지도 못하고 그저 어찌할 줄 모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느낀 절망은 삶의 무게를 깨닫고 사회의 어그러짐을 인식했을 때에 느끼는 답답함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옳은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기에 오는 막막함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회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모습 속에서 죽어서 그 모든 연약함을 잊고 새롭게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부조리함과 연약함에서 썩어질 것을 내어 던지고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리고 새롭게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진정한 ‘부활’의 모습입니다. 

톨스토이 『부활』의 표지

이 책의 시작은 한 살인사건의 재판입니다. 그곳에서 주인공인 네흘류도프는 어린 시절 자신이 겁탈한 한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창녀가 되어버린 카츄사라는 여인을요. 그녀는 그곳에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서 있습니다. 네흘류도프 자신은 배심원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네흘류도프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 상황은 그에게 혼란스러웠고,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런 혼란의 끝에서, 그는 결심하게 됩니다.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어그러진 세상 가운데 참회로써 살아감에 대해서요. 이는 진정 새롭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네흘류도프의 행적은 흥미롭습니다. 카츄사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모든 관계와 소유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 중에서 네흘류도프는 기존의 자신이 보지 못했던, 사회 깊숙이 녹아있는 ‘부조리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자신의 어그러진 모습을 보다가, 사회까지 그 시선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질문하는 것이지요. ‘누가 이를 정했는지’, ‘누가 그를 심판하는지’, ‘누가 그를 허용하는지’에 대한 정의의 문제를요.

집필 중인 톨스토이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 무얼 보여주려 했을까요. 너무나 원대한 그의 소설은,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무게가 버거운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너무도 단순하고 명확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개인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다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결국,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회가, 나 자신이, 어긋나 버린 그 ‘근원적’인 이유에 대해서요.

토지문제와 수감된 죄수들의 문제들. 구조적인 악의 문제. 그렇기에 드러나는 이웃의 어려움은 사실 부차적인 문제들일 뿐입니다. 그 모든 문제는 근원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기에 나타나는 하나의 얼굴일 뿐입니다. 근원적인 곳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필연적으로 '부활'의 목소리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어긋남을 인지하면 인지해갈수록 네흘류도프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어긋난 모습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됩니다. 주인공인 네흘류도프가 조금씩 이웃에게 관심을 두게 되는 것, 그리고 그 부조리함에 한 걸음씩 걸어가게 되는 것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관심이 아닙니다. 이는, 현재도, 과거도, 그리고 미래에도 존재하고 있는 부조리함에 대한 관심의 확장입니다.

이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들이 눈앞에 놓여 있습니다.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시야가 확장되고 생각이 달라진 그의 모습은 과거의 그의 모습과 대비되어 보입니다. 아마 그렇기에 더욱 선명히 ‘부활’의 이미지를 엿보게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새롭게 태어난, 새롭게 눈을 뜬 ‘부활’의 모습을요.

톨스토이는 죽어있는 것에 대한 부활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국한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부활은 카츄사에게 진정 참회하는 모습을 통해서 엿보게 하며 그와 함께 사회의 부조리함과 소유에 대한 질문을 하며 개인에서 사회적인 차원의 부활로 우리의 시선을 옮기고 있습니다. 이처럼 총체적인 부활의 이미지는 명확합니다. 톨스토이는 이를 네흘류도프의 변화된 삶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것이지요.

『부활』의 흥미로운 점은, 네흘류도프가 자신의 참회에서 확장되어 다른 이의 아픔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것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답답한 상황 속에 파묻혀 있는 것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묻고 있는 것이지요.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서요.

답답하고 추악한 세상과 자신의 모습을 직시할수록 ‘부활’의 이미지가 명확해진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막막한 세상 가운데 질문을 던지는 것, 그리고 답답한 자신의 모습에 질문을 던지는 것은 부활에 다가서는 한걸음이 아닐까요? 그것은 근원적인 것에 대한 질문이자,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질문을 통해 우리는 자신에 대한 바른 인식과 세상에 대한 바른 인식을 깨닫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동네 판 『부활』 표지

제가 이 책을 통해 엿보았던 부활의 이미지는 사랑의 확장입니다. 끝없는 질문의 종점에서 네흘류도프가 삶으로써 사랑하길 결심했던 것처럼, 나의 삶이 그러하길 소망합니다. 삶으로써 사랑을 살아낼 수 있기를요. 부활은 한순간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삶을 통해서 부활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길 원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삶 속에도 진정 ‘부활’의 삶이라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 돌아보게 됩니다. 부활한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부활. 그리고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삶의 답’으로서의 부활을요.

삶의 부조리함과 나 자신, 사회에 대해서 깊이 바라보길 소망합니다. 보면 볼수록 '부활'의 이미지를 내 삶의 렌즈를 통해 바라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부조리와 어그러짐에 대해서 회피하고 싶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서요. 그를 넘어, 우리는, 당당한 부조리함에 대해서 당연하지 않음을 제시하는 기적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나의 삶이, 우리네 삶이 그런 기적과 같은 '부활'의 삶이길 원합니다. 진정한 '부활'의 삶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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