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간다는 것 上 - 누구나 <이방인>이 될 수 있다
보통 누군가의 삶은 다른 누군가의 삶들을 통해 ‘어떠하다’고 정의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삶이지만, 나의 삶으로만 여겨질 수 없는 것은 우리가 한 사회 속에 함께 존재하고 살아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진정 ‘나의 삶’이란 것을 언제, 어느 때에, 어떻게 느끼고 계신가요? 많은 사람이 당연하게도 나의 삶은 나의 것이라 여기지만, 실제로 정말 그러할까요?
저는 가끔씩 제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생경한 감정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곧, 나의 삶이 나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감정입니다. 우리는 홀로 나 자신의 관점, 나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만 살 수는 없습니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살아가고 친구, 가족, 연인, 그 외의 수많은 공동체의 가치와 맞물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크게는 국가와 사회의 관습과 가치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지요. 이것에서 누구도 쉽게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다 이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갈 때에 그 사회적인 맥락과 자신을 구분 짓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카뮈의 『이방인』을 읽다 보면, 슬픔을 슬퍼하지 못하는 이를 통렬히 보게 됩니다. 『이방인』의 시작은 주인공 뫼르소의 어머니 부고로부터 시작됩니다. 어머니 부고에 대한 뫼르소의 태도는 다른 어떤 ‘일상적인’ 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잠을 자고, 밥을 먹는 그 ‘일상’과 말이지요.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초연한 모습을 보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라는 연인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게 되는데, 그 모든 일이 ‘일상’의 일부분, 어느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일상으로 비칩니다. 슬픔에 대해서 슬퍼하지 않는 뫼르소. 감정적인 것들이 정제된 그의 삶은, 그의 것이 아닌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저 멀찍이 서서 자신의 삶을 ‘이방인’처럼 관망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 뫼르소의 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우리 주변의 당연한 ‘반응’을 생각해보며 뫼르소와 다른 우리의 당연한 반응들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이야기는 긴장을 더해 가고, 뫼르소는 친구 레이몽의 싸움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리고 옆에서 총을 가지고 있던 뫼르소는 아랍인을 쏘아 죽이게 됩니다.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비극의 주인공인 뫼르소는 초연합니다. 어떻게 보면 다른 이의 비극을 극장에 앉아 구경하는 관객처럼 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귀찮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아이가 눈물을 그득 담고 있는 눈망울로 입술을 앙다물고 애써 서러움을 참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 모습이 용기 있어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더 애처롭거나, 처연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내 눈에 그 아이의 슬픔이 다 보이기 때문이겠지요. 『이방인』의 뫼르소의 상황은 누가 보아도 비극적이고 슬픈 상황들입니다. 그 상황 속에서 슬퍼하지 않는, 어떠한 흔들림도 없는 그의 모습은 어째서 더 비극적일까요?
너무나 통속적인 말이지만,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슬픔에 대한 태도는 당연히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슬픔에 대한 당연하고 알맞은 태도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나에게 슬픔이 다가왔을 때 슬퍼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쯤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슬픔, 그리고 기쁨. 수만 가지 감정들에 대해 우리는 인간으로서 그 모든 것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하지만 카뮈는 슬퍼함의 그 권리를 포기치 '않아야'한다는 사회적 관습 자체를 부정하며 그를 부조리라 여기도록 서슴없이 그려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부조리'한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하지 않았을 때 발견하게 되는 철저한 소외와 단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즉,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관습과 부조리한 면면을 뫼르소라는 인물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메세지를 전하는 중심 인물인 뫼르소는 그러한 사회적 모습에 무관심하고, 심지어는 귀찮아하기도 하는 것처럼 그려집니다.
저자는 앞서 제가 말한 인간으로서 가지는 모든 권리에 대해 그것이 정말 '권리'가 맞는 것인지를 냉정하게 되묻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그리고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한편으로는 우리의 관습이 점차 붕괴되고 있고, 우리가 인간으로서 공유하고 있는 이 사회의 맥락이 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방인』 속의 뫼르소라는 인물은 어쩌면 그 속에서 '이방인'으로 여겨지는 사회의 맥락과는 다른 특이한 인물로 나타나지만, 점차 우리의 사회 속에는 이러한 수많은 뫼르소들의 모습이 자주, 종종 등장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어느 시대에나 있는 기존 관습과 다른 생각을 가진 소외된 사람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마도 카뮈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의 관습과 생각에 반하는 어디에나, 어느때나 존재하는 그 '이방인'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적인 맥락과 관습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적인 면모가 될 수 있고 나도 어느샌가 '이방인'이 되어 주류에 있는 누군가에게 구분될지도 모른다는 것 또한 생각해보게 됩니다.
다시금 소설 속에서 '이방인'으로 여겨지고,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뫼르소를 떠올려 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어떠한 '이방인'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주류'의 어떤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막연히 생각해왔던 것은 아닐까요? 당연한 것은 사실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며, 우리 주변 어딘가에 있는 그 '이방인'에 대해 새로운 생각과 태도로 바라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