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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지 Jun 08. 2016

2.『폭풍의 언덕』

사랑의 열병을 앓는 누군가의 삶 下 - 야만스러움에서 성숙함을 바라보다 

폭풍이 지나가면 온전하게 남는 것이 얼마나 될까요? 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가면 모든 것이 쓰러지고, 사라지고, 상처 입습니다. 속으로 끓어오르는 사랑의 말로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베르테르를 통해 엿보았다면, 타오르는 격정적인 사랑의 폭풍을 『폭풍의 언덕』을 통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네요.

『폭풍의 언덕』의 저자 에밀리 브론테는 『제인 에어』를 지은 샬롯 브론테의 동생이자 역시 작가인 앤 브론테의 언니입니다. 이 작품은 그녀의 유일한 작품이며, 그녀는 출간한 이후 결핵에 인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한순간 열병을 앓고 떠난 그녀의 삶이 녹아있는 작품이어서일까요? 『폭풍의 언덕』을 읽을 때마다 알 수 없는 강렬함과 솟구쳐 올라오는 극렬한 감정들에 몰입되어 모든 것이 소진되는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워더링 하이츠(작품에 등장하는 언쇼家 저택 이름, 『폭풍의 언덕』의 원제이기도 함. “Wuthering Heights”)를 배경으로 합니다. 폭풍이 오면 정통으로 바람을 맞아야 했던 워더링 하이츠. 마치 등장인물들의 삶과 그들의 열병, 즉, 폭풍 같았던 그 감정의 부딪힘의 이야기를 한 단어로 요약해 놓은 것 같기도 합니다.

두번째 페이지:『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 1847년, 영국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이자 주인공인 ‘캐서린 언쇼’의 아버지는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그마한 아이를 주워오게 됩니다. 그 아이는 ‘히스클리프’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이후,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누구보다도 가까워지지만, 캐서린의 오빠 힌들리 언쇼는 히스클리프를 적대하며 지속해서 학대하기에 이릅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힌들리의 학대와 무시, 경멸은 더 심해지고 히스클리프가 견뎌내는 그 모진 삶의 모습은 제 마음마저 안타깝게 합니다. 그렇게 히스클리프는 지속적 학대 속에서 ‘야만’의 모습을 갖추어 가게 됩니다. 야만스러운 환경에 맞추어 ‘야만스럽게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함께였던 캐서린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캐서린은 아마도, 히스클리프에게 ‘빛’과 같은 존재였을지 모릅니다. 혹은, ‘사랑’ 그 자체일지도요.

성숙하지 못한 야만스러운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 서투르게 느껴집니다. 캐서린은 새롭게 알게 된 린튼 가문의 애드거와 왕래를 하게 되었고, 그들의 모습을 따라 자신의 ‘야만스러운’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그리고 히스클리프에게도 거리를 두게 되지요. 사실, 그녀 자신의 ‘야만스러움’ 안에는 히스클리프도 있었기 때문인거죠.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달라진 모습에 혼란스러워하게 되고 더하여, 캐서린의 말까지 오해하게 되어 워더링 하이츠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캐서린은 야만스러운 모습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애드거 린튼과 결혼한 이후 돌아온 히스클리프에 대한 태도를 보아도 그 격정스러운 야만의 감정을 품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너무나 처절하고, 야만스러움 그 자체입니다. (길고 긴 격정의 이야기를 이 짧은 지문으로 설명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자세한 이 이야기의 내용은 직접 책을 통해 경험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사실,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라기보다 야만스러운 감정의 폭풍 같습니다. 그 격정이 당황스러우므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어떠한 정제 없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감정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것으로도 여겨집니다. 『폭풍의 언덕』은, 타오름을 절절하게 표현한, 진정으로 ‘폭풍’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요? 과장되고 야만적인 모습이지만 그래서 어떤 것보다도 인간성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영화 <폭풍의 언덕> (1939년)

이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은 여타 다른 소설 속의 사랑의 모양과는 다른 모양의 사랑인 것 같습니다. 격정적이고, 폭풍 같은 그 사랑이요. 그들의 사랑은 모든 걸 다해 사랑하고, 모든 것을 다해 증오하며 분노하기까지의 모습입니다. 『폭풍의 언덕』의 사랑의 모양은 짝사랑과는 다른 모양의, 오롯이 나 혼자만의 사랑을 ‘외치는’ 모양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은 어쩌면, 의미가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 혼자만의 사랑, 나 혼자만의 열렬함, 나 혼자의 세상 속에서 그 사랑을 키워나가기에 누구보다도 더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등장인물들이 거의 모두가 일찍이 목숨을 잃는 모습은 ‘사랑’을 하는 것이 치명적인 ‘열병’을 앓는 것으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서평을 읽었습니다. 그 서평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저 또한 이 이야기를 그 사랑의 성장통 속에서 헤매고 있는 폭풍 같은 이야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방법으로 ‘표출’밖에 몰랐던 그리고 혼자만의 사랑에서 앓고 있다 그에 못 이겨 떠나가 버린 것이 캐서린이었다면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사랑과 분노, 자신만의 그 감정에서 벗어나길 거부하는 존재입니다. 마치 ‘광인’이라고 까지 여겨지는 인물이지요.

이들의 날 것 같은 야만스러운 사랑의 모습에, 오히려 성숙한 사랑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 격정적인 사랑의 모습에, 나 자신을 비춰보게 되는 것이지요. 성숙한 사랑이라는 것은 나의 모든 ‘원함’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랑이 아닐까요? 더하여 갈등을 통해서 조금씩 물러서고, 달라지고, 배려하는 모습의 사랑일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이번 칼럼에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같은 듯하여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시, 류시화 시인의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의 부분을 싣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가슴 안의 시를 듣는 것
그 시를 자신의 시처럼 외우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시를 잊었을 때
그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것
- 류시화,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2012.


사실상 연인이 되는 것은, 부부가 되는 것은, 깊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결국엔 ‘갈등’의 연속일 수밖엔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애써 이유를 찾아보자면 몇 년 혹은 몇십년 동안 우린 ‘혼자’로 살았기 때문일지도, 혹은 인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인간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기대와 나의 바람을 온전히 충족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한결 같이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와 같이 자신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의 기대에 대한 바람직한 충족으로 온전히 사랑을 영원토록 이루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겠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과 가끔은 다투기도, 가끔은 토라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갈등은 새로운 성숙, 새로운 모습을 낳습니다. 조금씩 성숙한 사랑의 모양을 갖추게 되는 것이지요.

저 자신에게 묻게 됩니다. 나 혼자 타오르고 있지는 않은지, 나 혼자만의 기대로 그 사랑의 모양이 얼룩져 있지는 않은 지를요.

내 기대에, 기준에 맞는 사랑의 모양을 설정해두고, ‘날 사랑하지 않으시나요?’ 하며 억울해하고 있었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사랑의 모양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야만스러운 사랑의 모양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나의 기대대로, 바람대로, 외침대로 상대가 반응해야만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완벽한 사랑의 모양이라 여겼던 것이 혼자만의 사랑이었을지도, 혹은, 너무나 야만스러운 사랑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 더 성숙해지지 않을까요? 모난 돌이 물결에, 바람에 둥근 모양으로 변화하는 것처럼요.

이제 사춘기가 지나갑니다. 우리의 사랑이 사춘기를 벗어나, 그 절절한, 인간 그 자체의 야만스러운 사랑에서 벗어나 조금은 성숙한 사랑의 모습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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