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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서울284|기억의 선로를 걷다

옛 서울역 준공 100주년 기념전시

by 무드온라이프


시간의 문 앞에서


서울의 한가운데, 남대문을 지나면 붉은 벽돌과 초록빛 돔이 보인다.
한 세기를 넘어선 이곳, 옛 서울역은 이제 ‘문화역서울 284’라는 이름으로 다시 사람들을 맞이한다.

올해는 서울역 준공 100주년을 기념한 전시 〈백년과 하루〉가 열리고 있다.


100년 동안 수많은 이야기가 오간 이 공간에서
시간의 무게와 사람의 온기가 동시에 느껴졌다.

익숙했던 외관을 다시 바라보니,
그 안에 스며든 세월이 따뜻하게 되살아나는 듯했다.


이곳은 수많은 만남과 이별이 오갔던 자리,
그 모든 시간이 여전히 공기 속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문화역서울284_입구전시배너.jpg 문화역서울 284 정문 입구. 서울역 준공 100주년 기념 전시 ‘백년과 하루’ 배너가 걸려 있다. 출처 : ©MoodOnLife


기억의 선로 위를 걷다


문화역서울284의 외관은 좌우 대칭의 안정감과 돔 천장의 우아함이 돋보인다.
붉은 벽돌과 석재 마감은 세월의 흔적을 품으면서도 여전히 따뜻한 질감을 전해준다.


안으로 들어서면 과거의 공기를 간직한 중앙홀이 펼쳐진다.

높은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 샹들리에 조명과

묵직한 문, 아치형 창문까지, 모든 요소가 ‘기억의 품격’을 지키고 있다.


나는 이런 고전적 아름다움의 모든 것이 좋다.

현대사회에서 만나는 고전미는

단아함과 굳건함, 그리고 아련함마저 공존해

현대인의 알 수 없는 허기를 채워주는 것 같다.


문화역서울284_전시입구.jpg.jpg 문화역서울284_백년과 하루 전시 패널. 출처 : ©MoodOn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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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원안내의 여객운임표가 시간여행으로 이끈다. 묵직한 문은 독특한 형태의 문손잡이와 높은 기둥이 웅장하고 품격을 유지한다. 출처 : ©MoodOn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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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서울284 중앙홀 전경. 높은 천정과 스태인드글래스 창문. 기둥과 샹들리에 등 예전대합실 모습이 보존되어있다. 출처 : ©MoodOnLife


전시는 ‘이어지는 기억’을 주제로 서울역의 탄생부터 전쟁, 복원, 문화공간으로의 변화를 보여준다.


벽면에 걸린 흑백사진 속에는 1920년대 공사 현장, 1980년대 학생들의 시위, 그리고 오늘의 관람객이 공존한다. 사진 전시를 보면서 나도 스쳐지나가는 시간대가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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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1924년 경성역 준공. 우:1950년 6.25전쟁 후 참혹한 서울역 출처 : ©MoodOn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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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1981년 서울역 야경 우:1980년 서울역앞 스크럼시위 학생들 출처 : ©MoodOnLife
KakaoTalk_20251031_094427761_06.jpg 문화역서울284 백년과 하루 사진 전시공간 출처 : ©MoodOnLife


이어지는 기억


옛 서울역에는 지금의 카페 같은 공간이 있었다.
당시 ‘끽다점’이라 불리던 찻집 겸 식당은
차와 맥주, 그리고 서양식 음식을 즐기며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는 장소였다.


문화역서울284_이어지는기억_오아시스음반.jpg 오아시스레코드의 음반들이 전시된 공간. 옛 서울역의 대합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의 기억이 오늘의 감성으로 이어진다. 출처 : ©MoodOnLife


이곳에서는 단순히 식음을 해결하는 것을 넘어
여행과 여가가 어우러지고, 음악을 향유하는 문화로 발전해 갔다.


사람들은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그 속에서 낯선 시대의 감성을 느꼈다.


요즘처럼 음악을 쉽고 빠르게 접할 수 없었던 시대,

내 기억 속에서도 LP판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의 힘은 참 대단했다.


지금은 음악을 접속과 구독으로 소비하지만,

그 시절엔 한 장의 LP를 소유하고, 직접 감상하는 일이 음악이었다.

나 역시 용돈을 모아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이 나오면

레코드점을 향해 달려가 LP를 차곡차곡 사모으던 기억이 있다.


그 시절의 음악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음반을 기다리고, 달려가서 사 오고,

턴테이블위에 바늘이 올라가 마침내 음악이 흘러나오기까지의 —

기다림의 미학이었다.


현재의 전시 '이어지는 기억'은

이 과거의 풍경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서울의 가장 오래된 음반사 오아시스레코드가 참여해
그 시절의 음악을 다시 울려 퍼지게 했고,

DJ 박민준의 큐레이션이 당시의 기억을 지금으로 불러왔다.


시간의 틈을 넘어, 서울과 서울역의 기억이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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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귀빈실 출처: 문화역서울284 공식 홈페이지, 우:부인대합실, 다채로운 패턴직물과 한복이 어우러져 근대의 기억 위에 새로운 감각을 입힌다. 출처©MoodOnLife


귀빈실은 근대의 품격과 사교의 흔적이 남은 공간이다.

고급 주택의 상징이었던 벽난로와 천정 샹들리에,

모리스풍(William Morris style) 벽지와 브래킷 조명이 어우러져,

그 시절 서울역이 지녔던 ‘도시의 응접실’로서의 품위를 고스란히 전한다.


한편, 옛 서울역의 부인전용대합실은 근대 여성 승객을 위한 별도의 공간이었다.
1·2등석을 이용하던 여성들만 드나들 수 있었던, 시대의 질서가 반영된 장소였다.
한때는 계층과 성별에 따라 나뉘었던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그 경계가 희미해진 자리에서 새로운 의미로 남아 있다.


이곳은 과거 서부역 일대의 섬유 산업과 여성 노동의 기억을 담은 전시실로 변모했다.
흥미로운 점은, 과거 뚜렷한 계층의 차이를 두었던 여성들의 공간 안에 이제는 그들이 만들어낸 노동의 산물이 함께 놓여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분리와 구분의 상징이었던 공간이 지금은 예술과 기억을 매개로 모두를 품는 장소가 되었다.


이렇듯, 진정한 문화예술은 역사를 품고 아픔을 녹여내며

사람들 마음속에 깊은 공감을 일으키는,

그런 힘을 지녀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동의 흔적


복도와 계단, 창문을 흐르는 빛 속에 건축의 품격이 깃들어 있다.

발걸음과 시간이 겹쳐지며 근대 건축의 절제된 아름다움이 조용히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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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서울284의 복도, 계단 등 이동공간의 풍경. 단아한 고전미가 공간의 품격을 지켜준다. 출처 : ©MoodOnLife
KakaoTalk_20251031_094529327_29.jpg 문화역서울 284_복도 끝에 마주한 창문을 통해 현대의 서울도심이 들어오는 풍경. 출처 : ©MoodOnLife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없이 계단만을 사용했을 당시,
수많은 옷깃이 스쳐 지나갔을 장소라고 생각하니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영화 속의 서울역


영화 〈밀정〉


2016년, 김지운 감독의 영화 〈밀정〉을 떠올리면 이 공간이 다르게 보인다.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의 의열단 활동을 심리적 긴장감 속에서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상하이의 골목과 경성의 거리, 그리고 그 시대의 공기까지 생생하게 담아냈다.


폭탄을 옮기던 의열단원들이 경성역에 내려

발각될까 두려워 숨죽이다 격투를 벌이는 장면이 있다.

당시 경성역의 밀도 있는 분위기는
지금의 문화역서울 284가 품은 기억의 무게와 닮아 있다.


애니메이션 〈서울역〉


2016년,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서울역〉은
같은 공간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비춰냈다.
좀비 사태가 벌어진 현대의 KTX 서울역과 광장을 배경으로,
가출 청소년과 노숙인 등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작품 속 서울역은
사회가 잊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모이는 상징적 공간으로 등장한다.
100년 전 경성역이 저항의 무대였다면,
지금의 서울역은 또 다른 시대의 고독과 불안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제, 다음 백 년을 기다리며


문화역서울284는 미술관에서 느끼는
작품 앞의 집중과 경외가 만들어내는 기분 좋은 긴장감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든든한 공간이다.


이곳은 모든 것을 품어줄 것 같은 포근함,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것 같은 안정감을 준다.


말하자면, 모진 풍파를 겪어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포용력,
시간을 품은 건축만이 줄 수 있는 위로가 이곳엔 있다.


앞으로 100년 후,

이곳에서 열릴 200주년 기념전시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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