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 속에서 발견한 아름다움
삶이 편리해진 지금, 무엇인가를 감싸기 위해 보자기를 사용할 일은 많지 않다.
과거에는 외출할 때의 가방이자 생활의 도구였지만, 오늘날 보자기는 주로 소중한 선물에 정성을 더하기 위해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
작년 명절, 전통시장에서 보자기를 고르다 절제된 색과 질감에 잠시 눈이 머물렀다.
몇 천 원 하지 않는 평범한 보자기였지만, 그 안에는 선조들의 일상에 머물던 담백한 품격이 고요하게 깃들어 있었다.
우리는 이렇듯 익숙한 것의 가치를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요즘 대한민국의 많은 것이 세계적인 트렌드가 되고 있다.
해외 젊은 여성들은 한국의 화장법을 따라 하며 K-Beauty를 경험하고,
외국 관광객들은 컵라면과 떡볶이, 김밥을 찾아 마치 맛집을 순례하듯 움직인다.
우리에게는 평범한 풍경이 누군가에게는 새롭고 기대되는 순간이 된다.
케데헌에도 나왔던, 연두색 플라스틱 접시에 담긴 음식의 디테일한 장면도 그렇다.
익숙하다 못해 무심히 지나쳤던 그 접시가 새로운 시선에서는 한국의 생활 미감을 보여주는 장면이 되었다.
편의점 벽면에 오와 열을 맞춰 진열된 라면에 놀라는 외국인들, 마트에서 흔한 진미채와 무말랭이를 들여다보며 신기해하는 모습도 본다. 어떻게 오징어를 이렇게 요리하느냐며 감탄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우리에게는 그저 일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문화이자 배우고 싶은 미감이다.
익숙함 속에 숨어 있던 가치가 전혀 다른 시선에서 다시 살아나는 장면들을 종종 목격한다.
이런 순간은 비단 지금만의 일이 아니다.
오래전 우리 선조들의 삶 속에서도, 조용히 빛나던 아름다움은 늘 일상 속에 스며 있었다.
조선의 아름다움은 오래전부터 우리의 삶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었다. 익숙해서 잘 보이지 않았을 뿐, 생활의 결마다 조용히 스며 있었다.
삶 가까이에 있었던 미감은 대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언어를 잃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감각을 가장 정확한 문장으로 포착한 이는 일본의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였다.
그는 뛰어난 장인의 작품보다 이름 없는 이들이 생활을 위해 만든 기물에서 더 깊은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조선을 생각한다』, 『조선과 그 예술』, 『민예의 길』에 기록된 그의 시선은 조선의 미를 단순한 양식이 아닌 삶의 품격으로 바라보게 한다.
1919년, 야나기 무네요시는 요미우리신문에 〈조선인을 생각한다〉를 연재하며 일본 내에 자리한 편견을 차분하게 짚었다. “우리는 그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 조선인의 마음과 삶을 향한 이 문장은, 그의 시선이 단순한 감상에서 비롯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22년에는 잡지 『개조』에서 광화문 철거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선과 일본 사회에 반향을 일으켰고, 결국 광화문은 완전한 철거를 면하며 보존의 길을 남기게 되었다. 조선의 예술과 생활 세계를 존중하려는 이러한 태도는 당시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꾸준히 소개되었다.
야나기의 조선 예술 연구는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하던 아사카와 다쿠미가 전해준 각진 백자 한 점.
투박하지만 균형 잡힌 비례, 청화로 그린 단정한 초화문, 장식보다 질감이 먼저 다가오는 표정.
이 단순한 백자는 야나기에게 새로운 미학의 문을 열었다. 훗날 ‘민예’로 정리되는 사유가 여기서 출발했다.
분청의 거친 결은 삶의 리듬을 닮아 있었고, 백자의 고요한 흰빛은 마음이 머무는 자리를 만들었다.
야나기가 수집한 도자기들은 훗날 조선민족미술관의 핵심이 되었고, 지금도 연구와 보존의 중요한 기반으로 이어지고 있다. 생활을 지탱하던 그릇에서 발견한 소박한 품격은 야나기 사상의 중심이자 조선 민예의 깊이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야나기가 말하는 민예는 기교나 서명이 지배하는 예술이 아니다. 생활을 위해 만들었기에 얻어진 자연스러운 형태, 의도를 앞세우지 않아 도달한 순수한 미감. 과장되지 않은 선, 절제된 곡선, 흙과 불이 남긴 흔적 속에서 야나기는 조선의 성품을 보았다.
공예가 장인의 기교를, 미술이 작가의 자의를 앞세운다면, 민예는 이름 없는 손이 일상의 쓰임을 위해 만든 물건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특별한 서명이 없고, 돋보이려는 의도가 없으며, 쓰는 이의 하루를 따라 자연스럽게 태어난 형태 속에서 그는 가장 순수한 미를 보았다.
“The beauty of everyday things lies in its unselfconsciousness.”
일상의 물건이 지닌 아름다움은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 Yanagi Muneyoshi. The Unknown Craftsman. 1972
어릴 적 할머니 방에 펼쳐져 있던 병풍의 그림들은 나에게 특별한 위엄이 없었다. 물고기, 꽃, 동물, 나무, 벌레가 편안하게 웃고 있는 세계. 이야기를 지어내며 놀던 그 병풍은 생활을 품은 작은 무대였다.
비단 색은 많이 바래 있었지만 친근한 소재들이 그림으로 조용히 스며들어 할머니 방의 아늑함을 만들어주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늘 마당에서 보던 풍경이 조용히 병풍으로 들어가니 더 친근해져서 말을 걸면 대답이라도 할 것처럼 가깝게 느껴지곤 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민화를 보며 '이름 없는 사람이 생활 속 기쁨을 담아 그린 그림'이라고 말했다.
집안을 밝히고, 복을 기원하고, 아이들을 즐겁게 하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스며든 세계였다. 그에게 민화는 조선 민중의 감각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난 예술이었다.
야나기는 민화가 지닌 생명력이 언젠가 세계와 이어질 것이라 믿었다. 생활에서 태어난 이 그림이 오랜 시간 속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드러내리라 확신했던 것이다.
야나기는 조선의 민화가 언젠가 세계적 가치를 얻게 되리라 확신했다.
그는 생활이 만든 그림에서 오래된 지혜와 따뜻한 생명력을 보았다.
그리고 문득 생각하게 된다.
지금 우리의 일상 역시,
언제든 새로운 시선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것들이 매일 쏟아지는 시대다.
신선한 경험을 좇는 동안, 오래 우리 삶을 지켜온 것들은 어느새 배경처럼 흐려져 간다.
눈에 익었다는 이유로 가치를 잃은 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묵직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세계가 주목하는 K-문화의 흐름을 보며
나는 종종 야나기 무네요시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 일상 가장 가까이에 있던 것들이
새로운 시선을 만나 다시 빛을 얻는 장면들 때문이다.
이처럼 익숙함 속의 가치가 다시 드러나는 순간을 보면서
삶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도 함께 달라질 수 있다고 느낀다.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지나쳐온 것들,
너무 익숙해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들 속에도
오래 머물러 있던 아름다움이 있다.
어쩌면 이는 사물만의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 자신을 바라볼 때에도 마찬가지다.
부족함과 흠만 먼저 보이던 자리에서
천천히 내면의 작은 빛을 발견하는 마음의 눈을
조금씩 길러가고 싶다.
익숙한 것들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가치,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요히 깨어 있는 마음의 눈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