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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니 Jan 14. 2021

하마터면 거지가 될 뻔 했다

살림 초보의 살림살이 구입기2

세상에 예쁘고 질 좋으면서 싼 것은 없다. 판매 페이지에 그렇게 쓰여있다면 대부분은 사기에 가깝다. 막상 받아보면 예상했던 것보다 별로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옵션을 눌러보니 내가 원하는 제품은 말도 안 되게 비싼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던지 말이다.


대출을 신청해놓고나서부터 가구와 가전, 침구와 커튼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인테리어 관련 앱에 들어가서 예쁜 집들을 구경하며 태그가 걸린 제품들을 살펴봤다. 내가 원하는 차분한 컬러의 원목가구들. 협탁 하나에 20만 원, 테이블 60만 원. 살 건 아니지만 예쁜 것들은 일단 위시리스트에 닥치는 대로 넣어두었다. 예쁜 침구, 이중 커튼.. 매트리스는 좋은 거 쓰라는 말을 어디 인터넷에서 주워듣고는 무슨 미국 브랜드니 뭐니 다 찾아봤다.


가전도 대기업 제품으로 검색했다. 그런데 대기업들은 1인 가구를 위한 예쁜 냉장고 따위는 만들지 않을 모양이다. 비싸고 고급져 보이는 냉장고에 집중하는 듯했다. 1인이 쓰기에 적당한 용량이면서 하얗고 냉동실이 아래에 있는 제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얀색들은 다 원룸에 옵션으로 있는 듯한 냉장고들 뿐이었다. 사실 나는 냉장고 용량에 대해서도 까막눈이었다. 그래서 가격과 디자인만 보고 골라야 했다. 아무리 찾아도 전체가 새하얀 바디의 냉장고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레트로 냉장고가 눈에 들어왔다. 외국 유명 브랜드의 레트로 냉장고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가격이라 보자마자 포기했다. 처음 들어보는 중소기업 레트로 냉장고라면 크기도 적당하고 가격도 생각했던 정도였다. 고민이 됐다. 성애가 많이 낀다는데 청소만 잘하면 되지 않을까?


세탁기는 부모님께서 무조건 L사로 사야 한다고 정색하시면서 말씀하셨기에 고민 없이 그 회사의 9kg짜리 드럼세탁기를 선택했다. 수건을 건조하면 뽀송하다길래 건조 겸용으로.




그러다 어느 순간 장바구니를 확인해봤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혼자 나와 살면서 발생할 식비, 전기와 가스요금, 통신비, 관리비, 대출 이자들을 내면서 이것들의 할부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리스트를 살펴보며 줄일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줄여보기로 했다.


원목 가구를 포기했다. 대신 최대한 자연스럽고 예쁜 무늬목의 거실장이라던지, 다른 제품들과 비교해 크기 대비 가격이 저렴한 테이블을 선택했다. 침대는 결국 퀸사이즈를 포기하고 슈퍼싱글로 구입했다. 아무리 좋다고 해도 100만 원이 넘는 매트리스는 쳐다보지 않기로 했다. 대신 후기를 꼼꼼하게 읽어보고 나한테 맞을만한 30만 원대 매트리스를 골랐다. 침대 프레임 대신 매트리스 받침대를 샀다. 세상에 이렇게 비싼 줄 몰랐던 커튼. 이중커튼은 사치였다. 베개솜 3개, 베개커버, 매트리스 커버, 겨울이불솜, 이불 커버 모두 더한 침구세트도 10만 원 안짝으로 구매했다. 왠지 사면 골치 아플 것 같은 중소기업 레트로 냉장고도 포기했다. 대신 깔끔한 다크 그레이의 대기업 냉장고를 샀다. 인덕션도 굳이 혼자 사는데 좋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예쁘면서도 크지 않은, 이동 가능한 작고 예쁜 2구짜리 인덕션을 선택했다.


그 외에도 예쁜 압력 전기밥솥이 비싸서 일반 전기밥솥을 사고, 최대한 저렴한 가격의 러그를 고르고, 싱크대가 너무 좁아 사게 된 조리대는 며칠 간의 검색을 통해 5만 원 대에 원하는 사이즈를, 조리대와 싱크대 코너에 딱 맞게 들어갈 원목 선반도 엄청난 검색 끝에 사이즈가 딱 맞는 5만 원 대의 제품을 찾아낼 수 있었다. 물론 가구들은 배송비가 추가로 붙어 배송비 지출도 만만치 않았다. 적게는 15,000원, 많으면 25,000원까지 받아갔다. 


생활하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구입해야 하니 숟가락 하나 가격에도 놀라며 검색하고 결제하고를 반복했다. 인터넷 쇼핑과 인연을 맺은 지 15년이 넘었지만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택배를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내가 뭘 받았는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결제내역을 찾아보고 리스트를 만들어 지워나가야만 했다. 




원하는 대로 샀다면 지금쯤 할부를 갚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빠듯하다. 그래서 어느 정도 타협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많이 타협했는데 주변에서는 이 정도로 좋은 것들을 샀으면 결혼은 안 하겠다는 것이냐고 묻는다. 아마 결혼하면 2인 살림에 맞는 가전 가구들이 필요할 테니 지금 굳이 좋은 것들을 살 필요 있냐는 말이겠지. 난 그 말을 칭찬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원하는 것보다 저렴한 가구들을 샀고, 원하지 않았던 컬러의 냉장고를 샀고, 침실은 침대랑 협탁 밖에 없어 썰렁한데도 그런 평가를 받는다면 나의 물건 보는 감각이 꽤 뛰어나다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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