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잘 살아서 미안(?)합니다
서른 살 때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있었다. 어떤 어른의 소개로 아주 잠깐 만났는데 잘생겨서 첫눈에 반했다. 얼마나 버는지 모르고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나보다 돈을 10배는 버는 전문직이었다. 자기가 돈을 잘 버니까 결혼하면 아내는 아기 낳고 집안일에 전념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비전 없는 일반 사무직이라 그렇게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집안일에 자신이 없었다. 20살 때부터 계속 돈을 벌어왔고 지금까지의 집안일이라고는 엄마를 도와드리는 수준이었다. 요리도 거의 안 해봐서 칼질이 서툰데 아침, 저녁을 예쁘고 영양만점으로 차려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경제 수준도 한참 딸리고 집안일을 잘할 자신도 없으니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결국 얼마 못 가 차이고 말았다.
그런데 웬걸, 나 살림이 체질인가 보다.
내 취향에 맞는 내 살림이 생기자 저절로 집안일이 재미있어졌다. 자취 첫 2주일은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져도 싹싹 치워냈다. 싱크대도 물기 없이 반짝반짝하게 유지했다. 지금은 조금 게을러졌지만 그래도 매일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쌓아두지 않는다. 세탁물을 널고 개는 행위가 이렇게 평화로운 것이었나 싶다. 주말에는 창을 열어놓고 전체적으로 쓸고 닦는다. 낮에 들어오는 햇살 아래 앉아 빨래를 갠다.
"엄마, 나 살림 천재인가 봐."
"초반이니까 그렇지. 시간 지나 봐라."
그런데 이상하게 두 달이 지나도 집안일하는 주말이 싫지 않다. 1인 살림이니 치울 것도 빨 것도 별로 없긴 하다. 어질러 놓은 사람이 나뿐이라 불만도 없다.
매일 간단하게라도 요리를 해 먹는다. 아직까지 배달음식을 시켜본 적이 없다. 사 와서 먹은 적은 있지만 그것도 손에 꼽힌다. 엄마한테 받은 음식은 김치와 장 종류. 나물이나 마른반찬 같은 것은 거의 받아본 적이 없다. 서툰 칼솜씨를 가지고 느리게 요리를 하는데도 결과물이 그럴듯하다. 생각보다 맛있어서 스스로 매일 놀라는 중이다. 나는 요리도 천재인가 보다. 플레이팅도 신경 쓰는 편이다. 먹기 전에 눈으로 즐길 수 있으니 식사의 만족도가 올라간다.
집안을 내 소원대로 미니멀하게 운영 중이다. 내가 원하는 미니멀 라이프를 실컷 하는 중이다. 물론 본가에서 내 물건을 싹 빼서 가지고 온다면 지금 보다는 복잡해지겠지만 버릴 건 버리고 나눌 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에 잘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생활 패턴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좋다. 나는 퇴근해서 바로 화장을 지우고 싶은데 부모님하고 살 때는 그게 어려웠다. 퇴근해서 집에 가면 엄마가 저녁 준비를 하고 계셔서 바로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면 씻기 싫어서 한참 다른 일을 하고 뒹굴다가 자기 직전에나 씻곤 했다. 하지만 이젠 퇴근하면 우선 씻는다. 다 씻었으니 잠자리에 들 때 "화장 지우기 귀찮아. 좀만 더 누워있다 씻자." 할 필요가 없다. 그저 할 일을 하다가 양치만 하고 바로 누우면 된다. 씻기 싫어서 잠을 미루는 상황이 없어져버렸다.
가족들이랑 복작복작 살면서도 서울의 혹독한 집값에 독립 엄두는 내지도 못하는 친구 Y는 독립 욕구를 억누르기 위해 나에게 독립의 단점을 물어왔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독립의 단점은 모르겠다. 굳이 뽑자면 가끔 무서운 것? 아니면 가끔 심심한 것? 이런 것들은 독립을 하지 않을 이유가 되진 못했다. 결국 Y에게 독립을 적극 권할 수밖에 없었다. (내 설득이 먹히진 않았지만)
나의 인스타를 구경하던 결혼한 친한 동생에게 DM이 왔다. "언니는 자취 만족도가 최상 같아."
내가 냉장고 털이를 위해 냉장고 속 재료로 일주일 식단을 짰다고 했더니 집에 놀러 온 친구가 말했다. "언니는 혼자서도 진짜 재미있게 살 거 같아."
아무튼 그때 결혼했으면 어땠을까? 어쩌면 결혼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고 취향과 가치관대로 살고 싶은데 그 돌파구가 결혼이라고 착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때 차인 게 참 다행이다. 결혼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느 정도는 남편에 맞춰 또 나의 어떤 것을 포기하거나 양보해야 했을 테니. 지금 생활이 재미있는 것은 혼자 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나의 계획대로, 내 삶을 온전히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 수 있다. 회사 아주머니들께서 '결혼하면 달라지니까 지금을 즐겨.'라고 하신 것처럼 이 자취생활을 즐길 생각이다. 누군가에게 미쳐서 결혼할 날이 오기 전까지.
나는 정말이지 자취가 체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