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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니 Apr 21. 2021

쿨워터향 나는 구매자가 되기로 결심한 사연

생애 두 번째 사기를 당하고 배운 것

3월에 승진을 했다. 본사와 떨어진 물류센터, 비전 없는 포지션이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의외의 승진에 조금은 기뻤다. 그동안 입고 담당자 타이틀에 맞게 하루에 많게는 몇 천 장의 옷을 세고 박스를 나르며, 다른 팀 전산 입력 서포트, 본사에서 새로 시작한 온라인 쇼핑몰의 출고 업무에 사무실 경리 업무까지..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월급이 올랐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스스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아침에 가끔 공원으로 달리러 나가는데 그동안  있는 이어폰을 끼고 달렸다. 그래서 에어팟 프로를 사기로 했다.  에어팟 3세대도 출시된다고 하니 가격이 많이 떨어진 것일까? 220,000 최저가를 보았다.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329,000원이니 10 원이나 싸게 주고 사는 거잖아? 당장 결제!




내가 당한 첫 번째 사기는 치아교정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아는 '가로수길 치아교정 치과 사기'이다. 300만 원에 추가비용 없고 교정이 끝나면 30만 원 상당의 치아미백까지 해주겠다고 했다. 300만 원을 지불하고 1년을 다녔다. 그러던 도중 치과가 문을 닫았고 사람들이 몰려가 원장 나오라고 난리였다. 그 많던 치과 직원들이 증발했고 소수의 의사와 위생사들이 출근해 진료를 이어나갔다. 사람들은 새벽 일찍부터 줄을 서서 진료를 기다렸다. 그 무리에 껴서 교정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을지 걱정하다가 다른 치과로 옮겨 200만 원을 더 지불하고 교정을 마쳤다. 그저 사랑니가 나면서 한쪽으로 밀린 치열을 다시 바로잡고자 했던 교정이라 발치 권유에도 한사코 싫다고 했던 나 자신이 기특했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는 큰 피해가 없었다. 무사히 마칠 수는 있었으니까. 돈이 더 들긴 했지만 치아교정에 보통 500만 원 정도 들어가니까 큰 손해는 아니었다. 다만 한쪽 송곳니가 치아교정 전과 다르게 회색빛으로 변했는데 풍치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치과에 검진받으러 갔을 때 색이 변한 치아에 대해 딱히 언급이 없는 걸 보면 큰 문제는 없는 모양이다.




다시 에어팟으로 돌아와서.. 다음날 도착할 확률 90%라면서 안 오길래 다시 들어가 봤더니 해외배송이라고 되어있었다. 이상하다, 주문했을 때 해외배송이라는 말이 있었던가? 판매자 문의 게시판에는 언제 도착하냐, 늦어서 취소했으니 환불해달라는 문의 글들이 달려있었다. 나는 결제한 지 이미 며칠이 지나있어서 그냥 기다려보기로 했다.


에어팟이 도착했고 뭔가 이상했다. 노이즈 캔슬링 잘 되고 블루투스 설정에 들어가면 연결된 에어팟의 시리얼 넘버도 조회되고 공간 음향인지 뭔지도 테스트가 다 되는데 애플 공식 사이트에 시리얼 넘버가 등록이 안 되는 것이다. 전화를 해서 해결하면 된다길래 전화를 했는데 애플 고객센터 측에도 만료된 시리얼이라 등록이 불가하다고 했다. 게다가 새 제품 치고는 스크레치가 나있거나 어딘가 싸구려틱한 마무리. 그런데 가품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하리만치 모든 기능이 다 잘 되는 것 같았다. 내가 쓸데없는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 중국 공장이 엉망이라 마감에 대한 불만이 많다던데 그래서 그런 건가? 찝찝했지만 구매확정을 눌렀다.


하지만 찝찝함은 가시질 않았다. 그래서 의심이 가는 부분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모두 남겨두었다. 다음 날 운동을 하려고 끼고 나갔는데 노이즈 캔슬링을 하면 바람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왔다. 오히려 끄는 게 조용했다. 다시 판매 페이지에 들어갔다. 문의 게시판에 몇몇 사람이 가품 판정을 받았다는 글을 올려놓았다. 아, 내가 사기를 당했구나! 사기꾼 주제에 감히 '스스로에게 주는 승진 선물'이라는 도취적인 기분을 망치다니. 오픈마켓 고객센터로 전화를 했다. 가품을 받아서 반품하고 싶다고 말이다. 심란한 주말이 흘렀다.


월요일날 출근해서 해당 페이지에 다시 들어가 봤는데 아직도 물건을 버젓이 팔고 있었다. 문의 게시글에는 가품 판정을 받은 사람들이 늘어났고 물건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구매 취소를 한 사람들 조차 환불이 지연되어 난리가 났다. 내가 판매자에게 물건을 돌려보내도 환불을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약 판매자가 환불을 해준다고 하더라도 가품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로 이윤을 남겼을 테니 괘씸했다. 그래서 오픈마켓 불법물 신고센터에 찍어둔 수령품과 정품의 차이를 이미지로 편집해 리포트를 보냈다. 리뷰에도 해당 리포트 이미지를 올려놓고 '각자 판단해라, 나는 무조건 환불을 받아낼 생각이다.'라고 썼다.


두세 시간쯤 후에 위조품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고 나는 "가품 판정받은 사람들이 많은데 아직까지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다, 피해자가 더 생기지 않게 해 달라"라고 했다. 위조품 담당자와 처리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다시 들어가 보니 관리자 권한으로 판매가 중단되었다. 나는 해당 담당자에게 가품을 보내기로 했다. 애플에 가품 감정을 의뢰하겠다고 했다. 가품임이 인정되면 환불을 해주겠지만 확인이 어렵거나 정품이면 물건을 다시 보내주고, 기간 만료로 판매자가 환불을 거절할 수 있음을 공지받았다. 일단, 가품이 아닐 리 없었고 확인이 어렵다 하여 20만 원을 날린다고 해도 판매자에게 다시 물건을 돌려보내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어 동의를 했다. 그리고 애플 스토어에 들어가서 329,000원 정가에 에어팟 프로를 질러버렸다. 남들보다 비싸게 공식 스토어에서 결제하는 나에게서 뭔지 모를 쿨함이 느껴졌다.




애플에서 구매한 에어팟을 끼고 오늘 아침 공원을 달렸다. 바람소리가 들리지 않는 깨끗한 음질. 가품인지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 아직 22만 원을 환불받을 수 있을지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마음이 불안하지 않았다. 만약 가품 확인이 어려워 22만 원을 날린다면 그냥 그만큼의 인생수업을 했다고 쳐야겠다.


남들보다 싸게 샀다고 자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내 주변에도 있었다. 만 원짜리 물건을 사면서 10원이라도 싸게 산 것에 대해 뿌듯해하는 사람 말이다. 그들에 휩쓸려 나도 최저가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고, 이번에도 그러다가 사기를 당했다.


이번 일로 결심한 것이 있다. 좋은 것, 가치가 있는 것을 살 때는 굳이 싸게 사려고 하지 말자는 것. 내가 남들보다 에어팟을 6-7만 원 정도 비싸게 주고 샀어도 괜찮다. 그만큼 더 열심히 쓰면 될 일이다. 그 돈을 아꼈다고 해도 또 어딘가에 써버렸겠지. 나에게 329,000원만큼의 가치가 있다면 굳이 최저가를 찾아다니면서 시간을 버리거나 불안함에 스트레스받지 않고 그냥 그 값에 사면되는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 비싸게 주고 산 나를 바보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이젠 당당하게 말하려고 한다. 난 최저가를 찾아다니는 시간을 돈으로 산 거라고. 가품인지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마음을 돈 주고 산 것이라고 말이다. 내가 거지도 아니고 한두 푼에 목숨 걸지 않기로 했다. 물건을 정가에 주고 사도 배 아파하지 않는 쿨함을 장착한 사람이 될 것이다.



PS. 가품이 기승을 부리는 제품은 이왕이면 출시된 바로 직후에 사길 바란다. 시간이 지나면 가품이 정교해져서 구분이 어렵게 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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