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단상 2020년 11월호
유튜브 알고리즘의 세계는 신기하다. 자기 전에 습관적으로 유튜브를 자주 들어가곤 하는데,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Oops!... I Did It Again!’ 뮤직비디오가 어느 날 느닷없이 떠 있었다. 브리트니 관련 영상을 누른 것도 아닌데 왜 떠 있는 걸까. 갸우뚱했지만, 옛날에 한창 즐겨 듣던 노래여서 오랜만에 추억을 되살릴 겸 뮤비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망설이지 않고 재생을 눌렀다. 재생을 누르자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고, 나는 뮤비를 보며 초등학생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수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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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수는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정말 좋아했다. 쉬는 시간과 청소시간에 곧잘 브리트니의 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6학년 때 우리 반은 토론을 좋아하는 선생님 덕분에 자주 분단을 나누어 하나의 토론 조 형태로 6명씩 책상을 붙여 앉곤 했는데, 수는 나와 같은 조였고 옆자리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지금과는 달리 내성적이었고, 말 수가 별로 없는 아이였다. 그런 나와 반대로 수는 외향적인 아이였고. 옆자리였지만 별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서 수와 나는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우리 반은 종례 후에 돌아가면서 두 명씩 화장실 청소를 했는데, 수와 내가 함께 화장실 청소 당번을 맡게 된 날이 되었다. 수와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그 당시에 해리포터에 한창 빠져있던 나는 얼른 청소를 마치고 집에 가서 해리포터를 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급한 마음의 나와 달리 수는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천천히 느긋한 자세로 청소를 했는데, 청소를 하면서 약간은 심취된 몸짓으로 브리트니의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바로 ‘Oops!... I Did It Again!’이었다. 청소용 대걸레를 마이크라도 되는 양 들고 노래를 부르던 수의 모습은 상당히 강렬했다.
MTV 채널에서 보았던 브리트니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가며 대걸레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수의 모습과 겹쳐졌다. 브리트니가 한국의 초등학교에 재림한 것만 같았다. 어찌나 열정적이었던지 나는 머릿속에 담겨있던 해리포터도 순간적으로 지워 낼만큼 노래를 부르는 수의 모습에 빠져들었다. 한창 그 모습을 보다 화장실에서 수의 공연을 나 홀로 보는 게 좀 아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수의 무대는 멋졌으니까. 그 장소가 화장실이었던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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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화장실에서도 노래를 부를 만큼 긍정적이고 열정이 넘치던 수에게는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급식으로 나온 우유를 먹지 않고, 책상 서랍에 테트리스 하듯 욱여넣는 게 바로 최대 단점이었다.
당번이 낑낑거리며 초록색 통에 담긴 흰 우유를 조별로 나눠줄 때마다 수는 무심한 듯 시크한 표정으로 우유를 받아 서랍 속에 넣곤 했는데, 옆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이래도 되나 싶었다. 제티나 네스퀵이라도 타서 우유를 먹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내성적인 나는 그런 말을 수에게 꺼낼 수 없었고 그저 수가 우유를 넣는 모습을 매일 바라볼 뿐이었다. 서랍이 꽉 찰 정도로 우유를 넣던 수는 더 이상 넣을 공간이 없자 우유를 서랍에 넣지 않았는데, 넣지 않은 우유들은 다 어떻게 했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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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의 서랍에서 우유가 다 터져버리는 사건이. 차곡차곡 쌓인 우유들은 시간이 지나며 팽창해 올랐고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듯 연쇄적으로 터져버렸는데, 나는 터진 우유들의 모습이 마치 과학시간에 배운 부레옥잠 같다고 느꼈다. 외형은 전혀 닮지 않았음에도 이상하게도 부레옥잠이 떠올랐다.
터진 우유들은 악취를 내뿜으며 서랍을 벗어나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는데, 아무도 그걸 치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수의 서랍에서 벌어진 일이니 수가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다들 생각한 듯했다. 바로 옆자리였던 나는 마냥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휴지를 가져와 바닥에 떨어진 우유 자국들을 닦았는데, 그때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우유를 치우던 수의 표정이 떠오른다. 수가 그리도 좋아하던 브리트니의 뮤비에 나오는 빨간 의상보다 더 새빨개진 얼굴.
전혀 도와주지 않으면서 치우는 모습을 보며 한 마디씩 쏘아붙이던 아이들의 얼굴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심함이 걸려있었고, 수는 아이들의 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울고 말았다. 교실 안의 세계에서 홀로 고독해져 버린 수의 모습에 슬퍼졌다. 자신감 넘치게 브리트니의 노래를 부르던 수는 사라지고, 풀 죽은 수만이 남은 그 모습은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참 묘한 것이었다. 더 이상 수가 브리트니의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봐 두렵기도 했다.
만약 수가 우유를 서랍에 넣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지만, 시간을 되돌려도 수는 여전히 서랍에 우유를 넣었을 것 같다. 대신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조용히 수에게 제티 스틱을 내밀고 싶다.
흰 우유를 싫어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제티는 하나의 연대와도 같으니까. 내가 대신 수의 우유를 먹어줄 수는 없어도 제티 정도는 내밀 수 있었을 텐데 친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러지 못한 게 괜히 미안해진다. 나는 미안해진 마음과 함께 어느새 플레이가 끝난 ‘Oops!... I Did It Again!’ 뮤비의 재생창을 닫고, 알고리즘의 추천으로 뜬 브리트니의 또 다른 노래의 재생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