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단상 2023년 1월호
볼일을 보고 동네로 돌아와 편의점 옆 골목에서 전자담배를 꺼내들었다. 익숙한 손짓으로 전자담배 기계에 담배 스틱을 꽂고 예열 후 담배를 태웠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다 핀 담배를 재떨이에 구겨 넣고, 전자담배 뚜껑을 닫으려는 순간이었다.
손이 미끄러졌다. 내 손에서 떨어진 기계는 그대로 하수구로 직행했고, 나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망했다. 이걸 어떻게 줍지. 불행 중 다행이게도 비가 오지 않아서인지 하수구에는 낙엽만 가득 쌓여있었고, 물기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긴 나뭇가지를 발견하고 그걸 반으로 꺾었다. ‘이걸로 꺼내면 되겠다.’ 라는 생각으로 하수구 속으로 나뭇가지를 집어넣었다.
그러나 나뭇가지로 기계를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기계는 낙엽 사이로 숨어들어갔다. 한참을 시도했음에도 전혀 공중으로 뜰 생각을 하지 않는 기계를 보며 나 혼자서 이걸 꺼내는 건 역부족이겠구나 싶어서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담배를 피러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죄송한데, 제가 여기에 전자담배 기계를 떨어뜨렸는데 줍는 걸 도와주실 수 있나요?”
내 말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알겠다며 피던 담배를 비벼껐다. 내가 나뭇가지로 기계를 들어 올리면 그가 꺼내기로 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꺼내지질 않았다.
나만큼이나 아쉬워하던 그는 휴대폰을 꺼내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긴 집게가 있냐고. 수화기 너머에서 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게가 없다고 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계속 나뭇가지로 들어올리기를 시도하는 수밖에. 계속 끙끙거리며 나뭇가지로 기계를 건드렸지만 기계는 낙엽이 포근했던지 도저히 나올 생각을 하질 않았다.
포기해야하나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골목으로 두 명의 남자가 등장했다. 이들도 아마 담배를 피러 들어온 것 같았다. 나는 그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남자들은 하수구 뚜껑을 들어 올리면 될 것 같다며 팔을 걷고 하수구 뚜껑을 들어올리기 위해 시도했다. 그러나 한치의 미동도 없는 뚜껑. 고정이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진짜 포기해야 하나 싶었지만, 이대로 포기 하기는 아쉬웠다.
그 때 였다. 지나가던 아주머니 한 분이 뭐하고 있냐고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 둘과 여자 둘이 머리를 맞대고 하수구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궁금할 만도 했다. 나였어도 지나가다가 뭔가 싶어서 물어봤을 것 같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전자담배 기계를 떨어뜨렸는데 꺼내질 못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아이구, 내가 오늘 이상하게 긴 집게를 새로 사고 싶더라니. 잠시만 기다려 봐요.”
신기함 그 자체였다. 하필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오늘 새 집게를 사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머니의 말에 우리는 모두 드디어 기계를 꺼낼 수 있겠다며 눈을 반짝였다. 잠시 후 아주머니가 긴 집게를 가져왔다.
비닐도 뜯지 않은 새 집게였는데, 하수구에 빠진 내 전자담배 기계를 꺼내는데 첫 개시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미안해졌다. 망설이며 비닐을 뜯고 있으니 아주머니가 얼른 꺼내자고 했다. 내가 집게로 집어 올리면 아주머니가 꺼내기로 했다.
마치 2인 1조로 호흡을 맞추듯이 나는 집게를 넣어서 기계를 집었고, 아주머니는 하수구 뚜껑 부분까지 올라온 기계를 꺼내는데 성공했다. 드디어 꺼낸 것이다. 그 광경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박수를 쳤고, 나도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포기하지 않은 결실을 드디어 맺었으니까.
아주머니에게 거듭 감사인사를 건네고, 사람들에게도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한 후 집어든 기계를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슥슥 닦았다. 기계에는 나뭇가지와 집게의 흔적이 짙게 남았지만, 마음만큼은 따뜻했다.
나 혼자였다면 절대 꺼내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아직도 전자담배 기계에 긁힌 자국들을 볼 때면 그들을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