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은 없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렸고, 우리는 그 비를 맞고 있었다.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신기했다. 더위에 약해 여름이면 투덜이 스머프가 되는 남편이 차분했다. 곱슬기 있는 머리카락 덕분에 비 맞는 걸 싫어하는 나는 웃고 있었다.
다섯 시간 전.
이틀 째 여름비였다. 소금강산 야영장의 아침은 불끈 떠오르는 태양 대신,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안개였다. 카라반 앞 데크에 앉아, 고요히 지켜보았다. 하늘을 가득 채운 회색빛 구름이 빗줄기를 주룩주룩 내리는 모습을. 끊임없는 빗방울이 세상만물에 촉촉이 스며드는 모습을. 짙은 녹음을 향해 내달리는 6월의 산을 연기 같은 안개가 보드랍게 쓰다듬고 지나가는 모습을.
일기예보는 맞지 않았다. 폰 화면 속 비구름은 숨바꼭질을 잘했다. 있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고, 없다가 다시 나타났다. 날씨앱 보기를 멈추고 손에서 폰을 내려놓았다. 우리는 토닥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아침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았고 보드게임을 했다.
낮 12시, 어느새 오락가락하던 비가 그쳤다. 우리는 낮잠에서 깬 듯 기지개를 길게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569 율곡 유산(遊山) 길. 대부분 블로거들이 짧은 트레킹 코스라고 소개하여 산책하는 마음으로 출발했다. 20대의 나였다면 이곳을 가능한 세세히 조사했을 것이다. 그때는 남들만큼 사진을 찍는 게 중요했었기에. 지금은 어딜 가든 즉흥적으로 받는 나만의 감동, 우리 가족만의 경험이 소중하기에 자세히 알아보지 않는다.
율곡 유산길을 걷다 보니, 우리는 소금강산을 오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부분 등산객들에게 이 코스는 진고개에서 노인봉을 찍고 하산하는 길이었다. 우리는 평지가 많은, 편한 길을 예상했었다. 오대산 국립공원 등산코스 추천 검색에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트레킹이냐 등산이냐를 이야기하며 우리는 한동안 웃었다.
보슬비가 오다 가다를 반복했다. 온몸이 흠뻑 젖는 비가 아니라서 괜찮았다. 어느 순간부터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 상관없어졌다. 비냄새가 상쾌했다. 콸콸콸 내려오는 계곡소리가 웅장했다. 물기를 머금은 소금강은 에어컨이 머쓱해할 정도로 시원한 공기를 잔뜩 불어내고 있었다. 이번달 내내 작렬하던 무더위가 내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혔다.
1569년 율곡 이이는 강릉 오죽헌에서 출발하여 이곳을 다녀간 2박 3일 동안의 감흥을 <유청학산기(遊靑鶴山記)>에 썼다. 청학이 깃들어 사는 선경이라 하여 청학산(靑鶴山)이라 명명했으나, 금강산의 빼어난 경치를 축소한 듯하다 하여 ‘소금강(小金剛)’이라는 이름을 추후에 지어주었다. 율곡은 산이름 외에도 다녀간 바위, 봉우리, 소 등 곳곳에 이름을 새로 붙였다.
율곡은 <유청학산기>에서 말했다.
“오대산이나 두타산 등은 아름다움을 전파하여 관람하는 자가 끊이지 않는데, 이 산은 중첩된 봉우리와 골짜기 속에 그 광채를 감추고 숨겨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하물며 그 웅숭깊은 곳이라! 이번에 우리를 만나서 후세 사람이 이 산이 있는 줄 알게 되었으니, 이 또한 운수인 것이다. 또 이외에도 신령스러운 곳이 세속 밖에 비장되어 있어 이 산보다 더 기이한데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 세상에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산 뿐이겠는가?"
율곡이 16세 때 어머니(신사임당)가, 26세 때 아버지(이원수)가 별세하셨다. 효심이 지극한 그는 외할머니(용인 이씨)가 위독하시자 관직을 사직하고 강릉으로 내려왔다. 1568년 말이었다. 이듬해 4월, 청학산을 방문했다.
이곳을 방문할 때 율곡의 마음은 어땠을까. 부모님의 빈자리를 대신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잘 알아주는 외할머니에게 다시금 감사해했을까. 그런 분을 영영 잃어버릴까 두려워했을까. 천길 낭떠러지 위를 걷는 기분을 안고 이곳을 와서 비경의 청학산(소금강)의 존재가 그래서 더 눈부셨을까. 후세에 소금강을 널리 알리고자 글을 쓰면서 그래서 더 애잔했을까.
1569년을 넘기지 못하고 외할머니는 90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녀를 애도하는 마음을 담아 율곡은 <이 씨감천기>를 썼다. 외할머니 마저 떠나보내고 칠흑 같은 어둠의 황망함 속에서 슬픔을 눌러 담듯 꼭꼭 눌러 글을 쓰는 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한 글자 한 글자에 그녀를 향한 사랑과 존경, 감사와 그리움이 아련히 퍼져 나갔을 것이다. 비통에 빠진 그가 달리 할 수 있는 게 있었을까. 마음에 큰 상처가 난 율곡에게, 글쓰기는 유일한 치료약이 되어주지 않았을까.
화장실을 찾고 있었다. 간절했다. 길이 너무 멀었다.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웠다. 힘들게 찾아간 곳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너무 지저분했다. 칸막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어떤 이유로든 나의 급한 볼일을 해결할 수 없었다. 애타는 마음이 절정에 닿았을 때, 눈을 떴고 나는 누워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오랫동안 반복되던 꿈이었다. 배경은 늘 바뀌었다. 상황도 다양했다. 화장실을 찾기만 하다가 깬 적도 있었다. 물어물어 찾아가기도 하고, 학교 쉬는 시간이라 돌아갈 시간이 촉박할 때도 있었다. 끝은 똑같았다. 답답하고 괴로웠다.
오랫동안 생각만 하다가 올해부터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건 그다음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꿈을 꾼 것이다. 화장실을 바로 찾아갔고 너무나 깨끗한 곳이었고 볼일을 기분 좋게 해결했다. 그 뒤로는 화장실 찾아가는 꿈을 꾸지 않았다.
꿈에도 몰랐었다. 내게 그동안 억눌려왔던, 해결하지 못했던 고통의 치료약은 글쓰기였다.
455년 전 율곡 이이의 눈길이, 숨결이 곳곳에 닿은 소금강산에 나는 와있었다. 화강암을 수백 만년 동안 휘감고 뚫고 깎으며 흐르고 있는 계곡 앞에 서있었다. 단단한 바위틈사이로 빼곡히 차있는 사계절 푸른 소나무숲을 마주 보고 있었다. 율곡 덕분에 세상에 알려진 소금강을 난생처음으로 제대로 알아봐 주었다. 그리고, 율곡과 같은 처방전을 받고 치료약을 착실히 먹고 있는 내가 있었다.
나는
낫고 있었고,
나을 것이고,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