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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의 바다 Aug 27. 2024

컴퍼스의 송곳


드넓은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34도였던가. 날씨앱에서는 어제도 지난주도 오늘도 모두 같은 날이었다. 8월의 한가운데 오후 4시 7분의 태양은 여전히 따가웠다. 프라이팬에서 지글거리던 올리브유가 가스 불을 끈 뒤에도 아쉬워 타닥거리듯이.


주차는 했지만, 우리 가족은 차 안에서 미적거렸다. 지금이라도 태양 속에서 걷지 않을 이유를 찾아낼 기세였지만, 그런 건 없었다. 나는 이윽고 차에서 한 발을 내리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에어컨으로 서늘해진 차 안의 공기가 먼저 빠져나가 두 팔 벌리고 서있는 뜨거운 대기를 만났다. 그다음은 내 차례였다.


후끈한 공기와의 만남 뒤에, 숨어있던 한 줌의 바람이 다가와 내 얼굴을 장난스럽게 간지럽혔다. 은은한 가을향기가 코 끝을 스쳐갔다. 일순간 나는 태양 속이든, 태풍 속이든, 그 어디든 걷고 싶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산들바람을 믿어보고 싶어졌다.






지도 출처 : 순천 낙안읍성 홈페이지



뜨거운 해가 내쏘는 광선이 소리까지 증발시킨 듯 고요해진 낙안읍성 입구로 들어섰다. 차가운 얼음을 가득 넣은 물병과 튼튼한 양산을 꼭 쥐고서. 동문으로 입장한 우리는 바로 왼쪽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을 밟고 성곽 위로 올라갔다. 새파란 하늘 아래 아늑하게 자리 잡은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베이지색에서 연회색까지 다양한 빛깔로 보이는 초가지붕은 잘 빗어 넘긴 머리카락같이 볏짚 한 올 한 올이 단정했다. 집 옆으로 가지런히 자리 잡은 텃밭이 보이고, 연잎으로 정성스레 수놓은 자그마한 연못이 있었다. 대대손손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성벽을 따라 자란 나무들을 보면서 걷는 길이 정겨웠다. 감나무에는 리본 같은 꼭지를 달고 있는 조막만 한 초록색 감이, 밤나무에는 연둣빛 보송한 가시의 동그란 밤송이가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아기 열매들이 성장하는 모습에 왜 이리도 마음이 애틋해지는지. 괜스레 딸아이의 손을 한번 더 잡아 보았다. 그녀의 봉숭아 꽃잎 같은 손이 더 커지기 전에 한번 더 기억해야 했다.


서문으로 가는 길 모퉁이에 높다란 계단이 있었다. 신데렐라가 12시에 뛰쳐나오다 구두가 벗겨진 층층이 계단처럼 아득해 보였다. 다리 근육이 애를 써서 끝까지 오르자, 시원한 바람줄기가 내 이마에 송글 송글 맺혀있던 땀방울을 섬세하게 날려 주었다. 시간이 멈춘 듯, 오직 대나무 잎사귀만이 바람에 흔들려 사각거렸다.





우리나라 읍성의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곳 중에 하나라고 했다. 14세기 토성을 처음 쌓았고 15세기에 석성으로 고쳐 쌓아서 지키기 시작한 마을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 전쟁과 새마을운동에도 살아남았다.


어느 댁 마당에 옹기종기 모인 장독대처럼, 읍성 안팎의 초가집들은 아기자기 모여 있었다. 집집마다 아름드리나무가 장승처럼 지키고 서있었고, 마을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는 산세가 엄마의 품처럼 따스했다.


민속촌이 아니고 드라마 세트장이 아니고 CG도 아니었다. 이곳도, 잿빛 고층 아파트들이 여기저기 도미노처럼 줄 맞춰 서 있는 그 한국이었다. 초가지붕을 갓처럼 머리에 쓴 황토집이 올망졸망 모여있고 그 사이로 오솔길이 구불거리는 이곳도, 21세기 한국이었다.





마을 속으로 들어갔다.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듯한 매미소리만 크게 들려왔다. 겨울잠 같은 침묵 속에 집이 있었고 길이 있었다. 그 옛날 아이들이 왁자지껄 뛰어놀다가 하나 둘 집으로 들어간 뒤 적막해진, 초처녁의 골목길 같았다. 평소에는 다양한 체험, 공연과 많은 관광객으로 시끌벅적하겠지만, 무더운 8월의 마을은 텅 빈 냉장고처럼 고고했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 나오는 소녀와 소년이 같이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일 듯 말 듯했고, 권정생의 동화 <강아지똥>에서 민들레가 강아지똥을 만난 담벼락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우리네 역사가 관통하는 이 마을에는 세대를 거쳐 끊임없이 오고 가는 사람들 속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서사가 흐르고 있었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Foster)>처럼 담백한 아름다움이 넘실대는 이곳에서 문득,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게 맞는 건지 의문스러워졌다. 부모님 세대보다 그 이전의 모든 세대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있지만, 우리 세대는 그래서 잘 살고 있는 걸까. 언제든지 고개를 들면 파란 하늘을 한눈에 가득 담을 수 있고, 자연 속에서 자연으로 만든 집에서 간소하게 살 때보다, 우리는 정녕 더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우리가 살면서
잊고 있는 것들,
놓치고 있는 것들,
알고도 모르는 척
외면하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만났다. 434년을 살고 있는 느티나무를. 이 고즈넉한 마을의 광막함, 수 백 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담담함, 소박한 이야기가 은하수처럼 흐르는 고상함. 이 모든 것은 환한 태양 같은 동그라미 안에 있었고, 그 원의 중심인 컴퍼스의 송곳은 바로 이 느티나무였다.





웅장한 느티나무 앞에 한없이 작은 나를 느꼈다. 434년 앞에 50년도 살지 않은 채 미약한 나를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뿌리 깊은 역사의 거름이 된 우리 민족의 힘으로 자란 나를 느꼈다. 강아지똥을 흡수한 민들레가 피운 꽃이 곧 나였음을 느꼈다. 나는 저절로 자라지 않았다.


컴퍼스의 송곳에서
시작되었다.

느티나무의 이야기였고,
나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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