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고산병 같아.”
10분이 지나 숨을 헐떡이며 딸이 말한다. 등산이 힘든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몸이 아픈 것이라고 입을 삐죽 내민다. 미국 록키마운틴 국립공원 해발 3,000미터가 넘는 곳에서 깡충깡충 뛰어다니던 아이는 어디 갔을까. 내가 물으면, 프랑스에 출장 갔다고, 그녀는 말한다. 등산이 힘들어서, 바게트 먹으며 에펠탑 보러 갔단다. 여행이 아니라 왜 출장인지, 미스터리하다.
정상까지 30분이면 오른다는 최단코스에 솔깃해진 우리는, 7월 더위 속 함백산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 만항재(1,330m) 근처 들머리에서 정상(1,572.9m)까지. 약 1킬로미터 거리로 240미터가 넘는 고도를 오른다는 가파름은 굳이 계산하지 않는다.
그때 못 온 게 천만다행이야.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남편이 말한다. 1년 전 겨울, 눈이 많이 온 어느 날 우리는 야심 차게 이곳 눈꽃산행을 계획한 적이 있다. 차가 미끄러져 들머리 근처에도 오지 못했던 그날을 떠올리며, 설산이 된 아찔한 오르막길을 상상해 본다. 큰 일 날뻔했네. 온몸을 부르르 떨며 나는 동의한다.
하얀색, 노란색, 보라색, 분홍색. 다채로운 야생화들이 하늘거린다. 가파른 등산길 옆에서 쉬어가라고 속삭인다. 붕붕. 벌인 줄 알았지만, 반들반들한 몸집은 더 크고 날갯짓 소리는 더 굵게 울린다. 꽃무지들이다. 꽃 사이를 오가며 분주히 꽃가루를 옮긴다. 나비들도 날갯짓을 보태며 꽃과 꽃을 잇는다. 햇살이 뜨거운 7월, 해발고도가 높은 태백산과 함백산에는 야생화 천국이 만들어진다. 여름이 곧 생명력을 꽃피우는 계절이다.
우리가 쉼터에 도착하자, 반지르르 윤이 나는 기다란 나무의자에 딸아이는 벌러덩 드러눕는다. 극기훈련하듯 힘들어하는 어느 아내와 타박하면서도 코치처럼 이끌어주는 그녀의 남편이 뒤이어 도착한다. 풍경을 감탄하며 끊임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아주머니 무리들까지. 고요하던 쉼터가 순식간에 북적인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느긋하고, 푸른 산맥은 굽이굽이 미소 짓는다. 얼굴의 땀방울이 식어간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좁다랗고 가파른 길을 올라가다가, 팝업북을 펼치듯 탁 트인 하늘이 나타난다. 시원한 바람이 내 얼굴 앞에 틀어놓은 선풍기 같다. 태백산맥 능선이 부챗살처럼 펼쳐진 가운데, 거대한 바위들이 높다랗게 모여 제단 같은 정상을 이룬다. 정상석 뒤에는 인위적으로 쌓은 돌탑이 단정하게 서 있다. 하지만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 자리 잡은 주름 가득한 바위들에게 눈길을 떼지 못한다.
하늘에 낮게 깔린 구름이 빗방울을 흩뿌린다. 올라온 길보다 조금 더 길지만 경사가 완만한 임도로 내려간다. 홀가분해진 딸아이의 발걸음은 공기처럼 가볍다. 바람에 흔들리는 야생화 사이에서 아이가 말한다. 엄마, 옛날 이야기해 줘. 재밌는 걸로. 나는 갑자기 할머니가 된 기분으로 기억의 서랍을 열어 들여다본다. 뭐가 재밌더라.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파란 멍과 혓바닥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니까, 엄마가 7살쯤이었나. 시소도 미끄럼틀도 좋아했지만, 그네를 제일 좋아했어. 아니, 그네를 타서 뛰어내리는 걸 좋아했었지. 그네에 서서 더 이상 오를 수 없을 데까지 올라갔을 때, 재빨리 앉는 거야. 그리고 있는 힘껏 앞으로 점프하는 거지. 어후, 지금 생각하니까 아찔하네. 우리 딸이 한다고 하면 위험하다고 뜯어말렸을 건데. 아무튼, 그땐 하늘을 나는 듯한 그 느낌이 너무 좋았어. 그리고 땅에 무사히 착지할 때의 쾌감은, 음, 올림픽 마루운동선수들은 알 거야.
그날도 그네를 타고 높이 올라갔어. 바람이 아주 달콤하더라고. 그런데, 점프를 하려고 그넷줄을 놓는 데 뭔가 느낌이 이상한 거야. 그네 바로 앞에는 시소가 있었는데, 엄마 턱이 시소 의자 위로 딱 떨어진 거지. 붕 날아서 엎드린 자세로. 우아아악, 퍽! 혀를 깨물어서 피맛이 났어. 엄~마~~ 엉엉! 혀를 이렇게 내밀고, 울면서 집으로 갔지. 다친 게 아픈 건지, 착지를 실패해서 속상한 건지, 아니 둘 다였겠다. 그리고 있지, 다음 날 깜짝 놀랐어. 턱 밑에 커다랗고 시퍼런 멍이 생긴 거야! 놀이터도 포기하고, 매일 아침 거울 앞에 진지하게 섰어. 파란 멍과 혓바닥 깨문 자국이 얼마나 나았는지 보려고. 휴, 그때는 하루하루가 시간이 얼마나 안 가던지.
듣고 있던 남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별난 어린이였네. 딸아이는 중간중간 키득거리고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이야기 듣기를 잘했다는 표정이다. 또, 또 재밌는 이야기 해줘. 나는 다시 서랍을 헤집고 다음 이야기 - 자전거 공중제비 - 를 주섬주섬 꺼낸다. 우리 옆으로는 둥근이질풀이 분홍 꽃잎 5개를 흔들며 줄무늬 꽃무지와 놀고 있다.
왜 그렇게 날고 싶었을까. 더 멀리 더 높이 날고 싶었던 아이. 그때 나는,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야생화 씨앗이었을까. 여기저기 둘러보고 더 나은 곳을 향해 눈을 반짝이는 씨앗 하나. 함백산의 바람 속에서 오래 잊고 지낸 내 모습을 떠올린다.
야생화는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의 방식으로 계절을 살아낸다. 낮은 기온과 거센 바람을 견디고 척박한 땅에 여름 한철 귀한 꽃을 피워낸다. 한 곳에 내려앉아 단단해진 씨앗 하나. 여기까지 오려고, 나는 오랫동안 날아다녔던 걸까. 단단해지려고, 그만큼 실패하고 넘어졌는지도 모른다. 거친 땅을 보듬고 뜨거운 태양과 시원한 빗줄기에 기대어, 마침내 줄기를 힘껏 뻗는다. 바람에 흔들리지만 꺾이지 않고, 눈에 띄지 않지만 단단한 뿌리를 지닌 야생화, 그들처럼.
나의 여름꽃 끝에서 씨앗이 된 딸아이는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 아래 내리막길에서 신이 난다. 프랑스로 출장 갔다던 그 아이는 지금, 바람을 타고 어디쯤 날고 있을까.
이 자그마한 씨앗이
마침내 내려앉을 그날까지,
더 높이, 더 멀리,
더 자유롭게 날아보기를.
나는 기다린다.
아이가 언젠가,
자기만의 계절을 살아낼 그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