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가족이 되어줄게."
“여보세요.”
“네 김용식씨 누나 되시죠?”
“…네. 맞습니다.”
낯선 지역번호로 걸려 온 전화 너머로 흘러나온 ‘김용식’과 ‘누나’라는 두 단어의 조합은, 이질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가웠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용케도 내 번호를 외워가 비상연락망에 적어 둔 그 녀석이 기특했다.
“OO구치소에서 전화 드렸습니다. 김용식씨 금일 재판에서 실형선고 되어 법정구속 후 OO구치소로 이감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아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아니길 바랬었는데. 엊그제 병원에서 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고 생각하니, 밀려오는 허탈감은 짧은 탄식으로 이어진다.
용식이와의 인연은 이른 봄, 꽃샘 추위가 채 가시기 전 시작되었다.
피곤한 토요일 당직이 마무리되고 교대하기 1시간 전, 응급실 전원전담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새벽 1시, 건물 화단에서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20대 남성을 인근 병원으로 이송하였으나 다발성 중증 외상 의심되어 전원 문의가 온 것이었다.
떨어진 건물의 높이는 목격자가 없어 알 수 없다고 했다.
흉부 및 복부의 활동성 출혈 및 폐손상이 심해 인공호흡기를 적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소포화도가 확보되지 않는 상태이나, 현재 병원에서는 외상외과 의사가 없어 치료가 불가능 하단다.
신속히 전원이 결정되었다.
이송까지 남은 시간 동안 활동성 출혈에 대한 응급혈관 색전술 및 심폐손상에 대비한 에크모 (체외막 산소공급 장치) 삽입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어 영상의학과 당직과 흉부외과 에크모 팀에게 연락해 스탠바이를 부탁했다.
사고가 난 시간은 새벽 1시, 전원 문의는 6시간 뒤인 오전 7시…
이미 중증 외상 환자 치료의 골든아워는 지나간 상황으로 이송 중 심정지가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전 날 당직으로 인한 피로감 따위는 잊어버릴 정도로 긴장감 속에 소생실에서 환자를 맞을 준비를 했다.
2시간 뒤인 오전 9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렸고, 이윽고 소생실로 환자 카트를 밀고 들어오는 구조사들의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역시나 환자는 죽음의 문턱에 한 발을 이미 디딘 상태였다.
인공호흡기 세팅 값이 최대치였음에도 불구하고 산소포화도는 유지가 되지 않았고, 흉부와 복부 모두 출혈이 진행되고 있었다.
병원에 있는 모든 혈액을 끌어 다 수혈하면서,
출혈 부위를 잡기 위한 혈관 색전술을 하기 위해 혈관조영실로 옮겨졌다.
“선생님! 혈압 50에 세츄레이션 (saturation) 40%까지 떨어져요!”
혈관조영실 간호사의 다급한 외침과 모니터 상의 빨간 신호음이 뒤엉켜 혈관조영실 안을 휘감고 있었다.
심한 폐손상으로 더 이상 인공호흡기 만으로는 산소 공급이 되지 않아 에크모 삽입을 결정했다.
혈압과 산소포화도가 계속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절차를 갖춘 소독과 준비과정은 사치이다.
혈관조영실 베드에서 소독약을 들이 붓고, 에크모 기계를 세팅하고 있는 사이 에크모 팀이 도착했다.
15분 뒤 에크모가 삽입이 되고 기계가 돌아가자, 환자의 활력징후는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들은 불과 환자가 응급실에 도착한 후 1시간 내에 이루어진 일이다.
머리, 경추, 폐, 갈비뼈, 대동맥, 간, 신장, 척추뼈, 팔, 다리 등등…
어느 곳 하나 온전한 곳이 없었고, 특히 대동맥 손상으로 인해 당시 생존 확률은 5% 미만이었다.
외상의 중증도를 나타내는 손상중증도 점수는 무려 41점.
손상중증도 점수가 15점을 초과하면 ‘중증외상’이라고 하는데, 용식이는 한참을 초과한 수치였다.
더군다나 주말이어서 일손이 부족했고, 다친 지 8시간이 넘어서야 우리 병원으로 왔기 때문에 아무도 용식이가 생존할 것이라 생각치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살리고 싶었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우스갯소리로 외상외과 의사는 자신의 수명을 갈아서 환자의 숨을 붙들어 놓는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사지가 붙들려 저승으로 끌려가고 있는 환자의 옷자락을 얼마나 간절히 당기느냐에 따라 환자의 예후가 달라지는 것을 종종 경험했기 때문이다.
간절함이 닿았던 걸까.
27팩의 수혈과 3번의 수술, 20일 간의 중환자실 치료 끝에 드디어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었다.
비 외상 환자들은 중환자실 치료가 끝나면 대부분 한시름 돌리지만, 외상 환자들은 일반 병실로 옮겨지는 순간부터 또다른 전쟁이 시작된다.
돈과의 전쟁.
병원 치료비야 어찌저찌 후원금으로 막아본다 손쳐도, 그 놈의 간병비가 항상 문제였다.
보호자라도 있으면 다행이련만 우리 센터로 오는 환자들은 절반 이상이 보호자가 없거나 버림을 받은, 소위 말하는 독거인들이다.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치료 행위들이 돈으로 직접 연결되기에, 질병과 재난은 가난한 자들에게 더욱 잔인하다.
더군다나 간병비는 대표적인 비급여 항목으로,
온 몸이 부서져 꼼짝 없이 누워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중증외상환자들은 일주일에 돈 백만원은 우습게 간병비로 날아간다.
중환자실에서부터 의식 없는 용식이의 각종 시술과 수술 동의서를 받기 위해,
경찰로부터 받은 보호자 연락처로 수십 번 전화를 돌려보았으나 그 누구도 받지 않았다.
분명히 부모님 연락처인데, 의아했다.
간신히 연락이 닿은 친구라는 사람으로부터 그제서야 용식이의 사정을 전해 들었다.
3살 남짓 무렵, 보육원 문 앞에 버려졌고 갖은 구타와 폭언을 견디다 못해
중학생 때 보육원을 뛰쳐나와 지금까지 길거리 생활을 했단다.
그래도 열심히 돈 벌어보겠다고 온갖 일을 다하며 살던 친구인데, 왜 건물에서 뛰어내렸는지 이해가 안된다는 말을 끝으로 통화는 끝났다.
동정과 딱한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간병비가 확보되어야 병실로 갈 수 있으니까.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은 다 써보았지만 후원 기준에 맞지 않아서,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동사무소에서 발급받아야 하는데 보호자가 없어서 등등 갖가지 이유로 간병비 후원은 거절당했다.
환자 상태가 좋지 않아 잠을 못 자고 집에 못 가는 건 이제 이골이 나 힘들지 않지만, 의술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이런 문제들 때문에 치료에 차질이 생기면 절망감을 넘어선 회의감이 든다.
결국 담당 지정의인 내가 지불 보증을 하고서야 간병인을 구할 수 있었다.
환자의 돈을 대신 내주는 의사라는 타이틀은 요즘 같은 시대엔 전혀 자랑이 아니다.
사회 시스템의 헛 점을 일개 개인이 영웅인 것 마냥, 메꾸려는 것 같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용식이는 물론, 병동 간호사와 전공의들에게는 개인 후원자가 있다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다친 지 한달 만에 용식이는 걸어서 병원 밖으로 나갔다.
나가서도 갈 곳이 없는 처지인 것을 잘 알기에, 퇴원하는 날 용식이에게 명함을 건냈다. 언제든 힘들 때 연락하라고.
용식이와 함께 찾아왔던 꽃샘추위는 어느 덧 지나가고 벚꽃이 떨어질 무렵, 꽤 씩씩한 표정으로 외래에 찾아온 그 녀석은, 친구집에서 잘 지내고 있노라 했다. 피검사 수치와 영상검사 결과 모두 안정적이었다.
그렇게 봄이 오려나 싶었다.
‘띠링’
몇 시간 째 모니터만 응시하던 피곤한 시선을, 한 통의 문자메시지 알림 소리를 듣고 서야 돌릴 수 있었다.
‘교수님, 저 용식이 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조만간 멀리 떠나야 할 것 같아서, 평소 하지 못했던 말과 하고 싶은 말을 하려 글을 적습니다.
사실, 퇴원 후 방황을 했었습니다.
가야 될 집이 없어서 노숙도 해봤고,
심지어 무료급식소로 가서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교수님한테는 친구 집에서 지낸다고 하였지만, 차마 말을 못하겠어서 이제라도 말씀드립니다.
저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하루가 너무 길었고, 지옥이 이런 건가 싶었습니다.’
그 뒤의 말은 읽지 않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너 내일 시간 날 때 병원에 좀 와라. 커피 사 줄게.”
“네 교수님…”
이튿날 오후, 계절에 맞지 않는 옷차림을 한 녀석을 병원 까페에서 만났다.
말없이 커피만 마시던 용식이는, 어렸을 때 보육원에서 가출한 뒤 갈 곳이 없어 방황하다가 비슷한 처치의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그 때 어울리던 친구들이 저지른 일에 같이 휘말려 재판을 받고 있는데, 너무 억울해서 술 김에 건물에서 뛰어내렸다고 했다.
“교수님. 제가 퇴원 후에 떨어진 건물에 찾아가서 CCTV를 확인해 봤는데요.
제가 떨어진 건물 옥상이 27층이었답니다.
제 눈으로 봐도 이해가 안됩니다. 정말 교수님 덕분에 기적처럼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전원 올 당시에도 목격자가 없어, 떨어진 높이는 미상이라고 아직 차트에 적혀 있다.
그런데 27층이었다니.
운이 좋아 주변 가로수 가지에 걸려도 즉사할 수 있는 높이이다.
아마도 전국의 권역외상센터에 추락으로 내원하여 생존한 환자 중, 최고 높이일 것이다.
최종공판을 이틀 앞두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찾아왔단다.
애써 무덤덤한 척 어깨한번 툭 쳐주고, 주전부리를 한 가득 사서 돌려보냈다.
공판 결과 좋을 거니까 기죽지 말라는 말과 함께.
착잡한 마음을 애써 추스르고, 용식이를 돌려보낸 뒤 회진을 돌기 위해 병동으로 갔다. 용식이가 예전에 머무르던 병동에 들어서자, 간호사님이 웬 음료수 상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이게 뭐죠?”
“아까 글쎄 김용식 환자가 병동에 찾아와서 감사하다며 이걸 주지 뭐에요. 전 처음에 못 알아봤어요. 너무 멀쩡히 걸어 들어와서 다른 환자 보호자인 줄 알았어요.”
이렇게 멀쩡하게 인간 구실을 하고 살지 몰랐다며 눈물을 글썽이는 간호사님의 모습에, 간신히 누른 마음이 다시 울렁거렸다.
최종 공판일 아침, 용식이에게 마지막 문자가 왔다.
‘아마 교수님이 아니였다면 저는 죽었습니다.
다치고 난 후, 교수님의 호의가 너무 감사했지만 혼자 망상도 하고 착각도 했습니다.
이제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저 사실 인생 살면서 제 이야기 귀 기울여주고 제 말을 믿어주는 어른과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가족을 갖고 싶었는데, 교수님은 저에게 진정 부모님 같은 분이십니다.
재판 결과를 떠나, 두 번 다시 이런 행동과 마음조차 안 먹겠습니다.
실망시켜드리는 일 없이 어려운 사람들 도우며 베풀면서 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재판 잘 받고 오겠습니다.’
어느덧 겨울이다.
용식이가 떠난 후에도 많은 환자들이 갖가지 사연을 안고 외상 센터로 실려오고 있다.
코로나로 생계가 어려워져 사는게 죽는 것보다 못하다며 칼로 배를 찌른 어느 동네 호프집 사장님,
먹고 살기 위해 배달일을 하다가 졸음운전 차량에 치인 청년,
서울사는 아들 보려고 시골에서 올라와 아들집을 찾다가 뺑소니 사고를 당한 아줌마, 그리고 최근 전 국민을 가슴 아프게 한 이태원 참사 환자들까지.
병원 안에서는 모두 똑같은 환자복에 인공호흡기를 달고, 온 몸에 주사 바늘 투성이인 많은 환자들 중 한 명이지만, 그들은 사실 모두 우리의 가족이었고 친구였으며 이웃이었다.
외상외과 의사를 포함한 대다수의 의사들은 응급실, 중환자실, 병실, 외래 등 병원 지붕 아래에서만 환자들을 만나고 있다.
그들이 원래의 삶으로 복귀하는 시점부터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치료 잘해서 퇴원시키는 것으로 의사의 임무는 끝나는 거라고.
세계보건기구 WHO에서는 건강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단지 질병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한 상태.”
신체적인 아픔만 치료해준다고 해서, 환자가 건강하다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적인 기능 회복의 책임을 환자와 보호자들에게만 지울 것이 아니라, 의사도 관심을 가져준다면 우리의 환자들이 병원 밖에서도 ‘건강’해지지 않을까?
병원에서도 보호자가 없던 용식이는, 2평 남짓 한 창살 안 공간에서도 보호자가 없어 나를 ‘누나’라 부르며 편지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 겨울도 결국 지나갈 것이고, 다시 봄은 온다.
찾아올 봄과 함께 용식이가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며, 이렇게 편지를 보낸다.
“너의 가족이 되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