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8년 11월 10일 금요일. 눈부신 하루
뽀송뽀송 바스락. 역시 호텔 이불이 최고야. 도대체 몇 시간을 잔 걸까. 휴대폰을 확인하니 오전 10시. 쌓인 카톡이 수백 개. 삼십년지기 톡방에 먼저 들어가 본다. ‘화제의 드라마 ooo 막방 시청률 33% 기록!’ ‘작가 맛밤의 정체는?’ 친구들은 자신들만 아는 작가의 정체에 뿌듯해하며, 귀여운 협박을 날리고 있었다. 누군지 소문내기 전에 한턱 제대로 쏘라며. 친구들아 미안. 브런치 2기 동기들도 맛밤을 알아.
“엄마, 뭐가 그렇게 재밌어?” 12살 공주가 품에 쏙 파고든다. 아차! 휙 이불을 젖히고 딸의 손을 이끌어 발코니로 갔다. 아침 인사를 건네는 에펠탑. 이곳 풀만 호텔을 선택한 이유다. 딩동- 조식은 룸서비스로 했다. 커피 한 모금에 에펠탑 한 번씩 즐겨본다. 곧 남편과 아들이 들어오는 부산한 소리가 들린다. 어딜 가든 밥때는 기가 막히게 맞추는 우리 집 남자들. 손부터 씻고 오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다가와 자랑을 늘어놓는다.
“엄마, 처음엔 얘네 팔다리 엄청 길쭉길쭉해서 긴장했거든? 근데 내가 쫌 전략을 잘 짜잖아. 3번 대결했는데 다 이겼어!”
일주일에 한 번씩 5년을 배운 펜싱이다. 당연히 그래야지. 라는 말을 꾹 삼키고 폭풍 칭찬을 쏟아냈다. 뿌듯해하는 녀석. 어느새 내 키를 훌쩍 넘었구나. 파리에서 보니 더 훈남이네. 그러다 곧 중2라는 생각에 정신이 들었다.
엄마는 딸을, 아빠는 아들을 단장해주고 있을 때, 콜이 왔다. 리무진이 도착했다고. 햅번룩 위에 코트를 걸친다. 가을에 패딩 개시, 겨울엔 패딩 위에 패딩을 입던 내가. 룸을 나서며 거울을 보는데, 볼은 복숭앗빛에 눈도 반짝인다. 그동안 방구석에 틀어박혀 자판을 두드리느라, 내 얼굴도 잊고 살았는데. 꽤 만족스럽다.
리무진은 우리 가족을 에르메스 본점 앞에 데려갔다.
‘아들 13살, 딸 11살이 되면 파리에 와서 버킨을 사야지.’
10년 전 결심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은경쌤 덕분에 1년 미루었다.) 왜 버킨 이냐고? 2018년 어느 겨울날, 버킨백은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다는 기사를 보고 그냥 결심했다. 언젠가 에르메스 본점에 와서 버킨을 사고 말겠다고. 2019년 1월 1일부터 하루 13,699원씩 나를 위한 돈을 매일 저금했다. 1년 500만 원을 목표로 잡은 금액이다. 그 루틴도 벌써 10년이다. 거기에 작년 입봉작이 대박 나서, 사려고 했으면 벌써 샀다. 차기작을 내놓으라는 시청자들의 요구에 작품을 써재끼느라 돈 쓸 시간이 없었을 뿐. 연이은 흥행에 포상 휴가로 파리에 오게 되었으니. 역시 많이 벌어도 공돈이 최고다.
비밀의 방에 들어갔다. 셀러가 우리 가족이 맘에 들었나 보다. 그레이 한 방울 섞인 하늘색 버킨백에 핑크빛 캘리미니까지 들고 왔다. 엄마와 딸의 퍼스널 컬러를 고려한 안목이 정말 탁월하다. 결제하려는데, 남편이 카드를 쓱 내민다. 퇴직금으로 선물하겠다며 내가 모은 돈은 좋은 곳에 기부하자고 한다. 이 남자 왜 갑자기 멋져졌지? 하는데, 남편이 아들에게 말한다. 여자들에게 이렇게 하는 거라고. 풉.
어느덧 황혼이다. 에르메스 상자들은 호텔로 딜리버리 보내고, 우리 가족은 에펠탑 앞 카페에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 온 신혼부부도 여럿. 그들의 달콤함이 부럽지 않은 걸 보니, 나도 꽤 행복한가 보다. 분위기에 스며들고 있는데 주위가 소란해졌다. 무슨 일인가 둘러보니 보영이랑 서준이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내 작품을 빛나게 해 준 이번 드라마의 주인공들. 저녁 식사를 함께 하겠느냐 물었더니, 남편과 나를 위해 아이들을 데려가 주겠단다. 거절하려 했는데 이미 예쁜 이모와 잘생긴 삼촌 옆에 찰싹 붙어있는 아이들. 잘 키웠다 정말.
에펠탑을 눈에 담으며 남편과 천천히 걸었다. 서로의 손등이 슬쩍슬쩍 스쳤다. 남편이 깍지를 꼈다. 순간 찌릿 전기가 올랐다. 이어 따뜻한 온기가 손을 감쌌다. 남편을 바라보았다.
“이번 생에 넌 어쩔 수 없다니까.”
눈을 마주치는 대신 남편이 말했다. 마음에서 무언가 몽글몽글 피어오르던 순간, 에펠탑에 불이 들어왔다. 잡은 손에 힘을 꼬옥 주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에펠탑 안에 위치한 레스토랑. 메뉴판을 건네며 직원이 말했다. 신혼여행 축하한다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그렇게 어려 보여?"
"내 눈엔 아직도 스물한 살, 처음 만났을 때랑 똑같아."
아무래도 파리로 오는 비행기에서 똑똑해졌나 보다.
"오라방도 스물다섯 같니?"
"어쩌지? 오빤 49살로 보여."
대문자 T의 대답에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남편. 그동안 작품 쓴다고 온갖 히스테리 부렸어도 다 받아준 남편. 그의 꿈은 장항준이었지.
근사한 식사를 방해하는 휴대폰 벨이 울렸다. 제작사다. 넷플릭스에서 연락이 왔단다.
"오빠 또 어쩌지? 나 다시 바빠질 것 같아."
네가 할 수 있거나 꿈꿀 수 있는 일이라면,
지금 당장 시작하라.
그러한 담대함에는 비범한 능력과 힘,
그리고 마법이 숨어있으니까.
-괴테-
(제목 사진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