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인간 30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한 나라의 주민A Sep 07. 2022

열심의 화학 작용

여름의 미적지근한 어스름이 인상적이던 주말의 늦은 밤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카페 진열장 안에 나열해있는 케이크들의 간격을 맞추고 있던 내게 친구가 말을 걸어왔다. “요즘 제가 열심히 사는 것 같지가 않아서요.” 느릿한 그 말에서는 희뿌연 죄책감의 향이 났다. 어슴푸레 피어나는 후각의 아지랑이. 아, 기억났다. 이건 고해성사의 향이다. 나는 이것과 비슷한 향을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맡아본 적이 있었다. 지하에 있던 가스나 지하수가 빠져나가게 되면 그 자리에는 공동이 생긴다. 이때 공동의 천장이 상부 지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붕괴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싱크홀의 발생 원리다. 인간의 마음도 이와 닮아있다. 한숨과 눈물이 빠져나가 텅 빈 가슴은 쉽게 무너져 내린다. 그래서 나는 모서리 없는 태연한 표정을 하고 핀셋으로 집듯이 조심스레 위로의 말들을 그의 가슴 안에 채워넣었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느니’, ‘쉴 때도 있어야지’하는 변론투의 말들이었다.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내내 입 안에서 껄끄러운 느낌이 맴돌았다. 혀로 아무리 밀어내도 빠지지 않는 이 사이의 찌꺼기 같은 게 낀 것만 같았다. 내가 이 이상한 느낌의 정체를 알게 된 건 며칠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였다. 왜 이 당연한 걸 진즉에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그는 그날 9시간의 노동을 견디는 중이었다. 그는 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중에도 열심히 살고 있지 못하다며 죄책감을 느꼈을까. 이건 마치 코를 고는 사람이 자고 싶다며 피로를 호소하는 꼴이다. 나는 무엇을 향해 그를 변론했던 걸까. 담배를 피우는 중에도 담배가 피고 싶을 때가 있다는 동생의 말이 귓바퀴를 타고 고막의 안쪽으로 과거에서부터 역류해 들어왔다. 그것은 중독의 신호였다.     


  우리는 ‘열심’이라는 화학적 단어에 깊게 중독되어 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열심히라는 말은 투여 시 인간을 각성 시키는 효과가 있다. 의지적 흥분을 일으켜 사람을 일시적으로 고무시킨다. 하지만 약물이 그렇듯이 '열심'이라는 말도 반복 투여 시 내성이 생기기 마련이다. 약빨이 점점 받지 않게 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열심히 주사를 한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놀 때도 열심히 놀고, 밥 먹을 때는 열심히 밥만 먹고, 뭘 하든지 열심히 해야 한다. 죄책감은 중독의 부작용이다.     


  칸트는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말했다. 2022년의 ‘열심’에도 목적으로써의 가치가 남아 있었다면, 나는 거기서 편집적 강박이 아닌 경의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열심의 근저에 깔린 불온함을 경멸하고 있다. 공부의 이유는 무엇인가. 0.1%의 자기수양과 99.9%의 취업 성공, 높은 연봉이다. 부지런함의 이유는 무엇인가. 남들보다 모이를 많이 먹는 새가 되어 재산을 축적하기 위함이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돈에 대한 이야기다. 열심은 돈을 벌거나 타인에 대한 상대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심을 외치면서도 건물주를 꿈꾼다.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을 다한다. 돈만 잘 벌 수 있다면 처음부터 열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거다.     


  이렇게 말해놓고 무안하지만 돈 버는 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이 돈이 필요하다. 돈 욕심이라고 해봐야 대게의 사람들에게는 자기 이름으로 된 주택이 있었으면 하는 정도다. 당연함에 욕심씩이나 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럼에도 열심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는 염증을 느낀다. 사랑과 용서, 연대와 공감에 나의 열심을 헌정시로 바칠 수 있다면 이 찝찝함을 떨쳐낼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