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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주민A
Sep 03. 2022
깃털이 본성에 따라 날아오르고 빗방울이 습성대로 떨어지듯이 인간에게도 선천적인 기질이 있다. 인간은 선을 긋는 데 익숙하다. 관계의 선은 준수할 필요가 있다. 치킨과 나의 관계는 2만원대 선까지. 그 이상이 되면 내 지갑은 영구적인 국교 단절을 통보하리라. 반대로 선만 잘 지켜준다면 나는 그를 야식회담의 상석에 앉히고 맥주 대신에게 그를 보필하도록 명할 것이다. 뇌의 주름을 따라 흐르는 생각의 전류를 일정하게 유지하라. 상식의 정격전압에 맞춘 생각을 논리라 하며 그것은 대부분의 곳에서 통용되어 사용이 편리하다.
하지만 선 긋기를 즐기는 인간의 기질은 양면의 동전이다. 한쪽이 선을 긋고자 하면, 반대쪽은 선을 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두 발 달린 법전처럼 제한선, 상식선, 금지선 온갖 선들을 엄격히 준수하던 사람이 콧바람처럼 미약한 호기심에 전복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는 한다. 두 상반된 기질은 손톱의 두께만큼 얇게 밀착해 있어서 두 기질이 실은 한 몸이라 해도 반론을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선을 넘기 위해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를 대단히 설득력 있는 의견이라 생각하여 당신이 곤란에 빠질 상황이 아니라면, 혹은 그러할지라도 각오가 되어 있다면 선을 넘어보길 권장하는 바이다. 논리는 만 개의 부품으로 조립된 기계인형만큼 정교하지만, 그것의 비좁은 속처럼 협소하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면서도 우주의 좁쌀에 지나지 않는 지구조차 논리의 주머니에 넣지 못하고 있다. 반면 존재는 심해의 수렁을 발로 딛고 일어서 먹구름 안에서 안광을 번쩍일 정도로 거대하다. 홀로 제국을 일으켜 세계를 지배한 패자, 민족을 구원한 영웅의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아이들을 보라, 지루한 책상에 앉아서도 지붕을 뚫고 대기를 찢어 그 너머에 있는 우주를 꿈꾸지 않는가. 인간의 존재를 논리에 담으려 하는 건 고래를 어항에 넣으려 하는 것과 같다. 어항은 고래의 한쪽 꼬리지느러미도 감당하지 못하고 깨지고 말 것이다.
선의 밖을 내다보려는 충동을 낯선 이방인처럼 대하지는 말아주길 바란다. 실은 그는 우리의 아주 가까운 친구로, 인간의 기원 때부터 핏줄을 따라 항해해온 오래된 동반자다. 아담과 하와가 금기를 깨어 전 인류가 공범이 된 날, 그의 항해는 에덴의 사과나무 밑에서 시작됐다. 배의 갑판 위에는 커다란 나팔이 있어서 그가 그것을 불면 인간은 기준, 논리 같은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2018년 여름, 나는 군입대를 앞둔 배의 조타륜을 틀어 평균의 항로를 이탈했다. 26살이 되도록 군대도 안 간 놈이 흔한 스펙 한 줄도 없는 상태로 총학생회장을 하겠다니, 안 그래도 또래의 평균에 못 미치던 취업 가능성이 더욱 바닥을 칠 게 뻔했다. 당연하게도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어서 올해 초까지 진로를 정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대담한 결단이었다거나 철없는 행동이었다 같은 수식어를 그때의 선택 앞에 붙이고 싶지 않다. 그저 선택이 있었을 뿐이고, 잃은 게 있나 하면 얻은 것도 있었다. 최소한의 평가를 하자면 삶을 배웠다고 말하겠다. 기준을 이탈했다는 불안감을 견디며 어디든 걸으면 길이 된다는 것과 인간은 말이 아닌 행위로 증명된다는 걸 배웠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도 한 곳을 볼 수 있는 감각을 체득했다.
언어가 메마를 때일수록 논리의 영역에서 벗어나야 한다. 논리의 치외법권으로 나가 살아있는 행위의 언어를 관찰해보는 게 어떠한가. 말로 설득할 수 없는 사람과도 밥 몇 술 뜨면 식구가 될 수 있다. 삶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질 때는 평균과 존재적 거리두기를 시행해야 한다. 타인의 기준에만 맞춰 자신을 계속해서 재다 보면 영혼의 척추에 디스크가 오고 정신의 골반이 돌아가 올바른 자세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세상에는 맞는 옷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가끔은 재지 않는 게 삶의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