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견딤 이후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견딤의 시간, 쓰임의 의미

정호승 시인의 “견딤의 시간이 쓰임의 기간을 결정한다.”

이 문장이 유독 오늘 마음을 오래 붙든다.

일본에는 천 년을 가는 절이나 궁궐을 짓는 장인을 ‘궁목수’라 한다.
니시오카 가문은 무려 1400년 동안 그 사명을 이어온 궁목수 가문이었다. 그들은 말했다.

“천 년을 갈 건물을 지으려면 천 년 된 노송을 써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나무로 지은 건물은 천 년을 버텨야 한다. 그래야만 그 나무에게 면목이 선다.”

천 년을 견딘 나무는 천 년의 쓰임을 받는다.

시간이 곧 쓰임의 깊이가 되는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견딤의 시간’들이 있었다.

스물여덟, 첫 아이를 안았고, 쉰을 향해가는 동안 네 남매를 낳고 기르며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딸로 인생의 후반기를 전쟁처럼 지나왔다. 한 순간도 나를 위한 삶이라기보다 ‘누군가에게 귀한 쓰임’이 되기 위한 견딤이었다.

우울함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마다 “그래도 버텨야 해”라며 나를 다잡았고
‘성장’이라는 단어보다 '충실한 역할’을 선택하며 살았다.

하지만 문득문득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허무와 상실감 그리고 남편에 대한 배신과 분노가 올라옮때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스스로의 질문에 잠기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앞에서는 엄마로서 자랑스러운 존재이고 싶었고 내가 바란 삶은 자아를 실현하며 담백하고 고요하게, 그리고 우아하게 늙어가는 삶이기를 바랐다.

감정의 허기짐을 지혜롭게 달래며
폭풍 속에서도 휩쓸리지 않기를,
삶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갈대처럼 흐르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 나는 뒤늦게 '독립'을 선택하고서야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통해 삶의 양식을 채워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독립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나는 누구에게도 쓰임이 없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남아있는 삶만큼은 책임과 의무가 아닌 스스로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도 나는 그 때 선택했던 책임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를 가장 아프게 했던, 가장 사랑했던 기억들을 울컥울컥 삼키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모래사장 위 이름 없는 수많은 발자국들이 파도에 깨끗히 지워질 때쯤이면 내 그리움의 파도도 잔잔해질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보다는,
‘쓰는 내가 더 이상 없어진 것 같다’는 기분이 더 가까웠다.

글을 쓰는 일은 언제나 내게 위로였고, 나 자신과 대화의 통로였고, 나를 견디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어떤 순간부터는 그마저도 나를 버겁게 만들었다. 한 줄 쓰는 일이 하루를 살아내는 일보다 더 고된 일이 되었다.

이 채 정리되기 전에 마음이 먼저 흐트러졌고, 의욕보다 멍한 침묵이 더 길어졌다. 견디고 버티는 삶을 살아가는 데 온 정신을 다 써버리고 나면, 남는 건 아무 글도 없는 텅 빈 종이 한 장이었다.

그렇게 아홉 달,
나는 아무런 글도 쓰지 않은 채, 다만 견디는 시간을 통과해 왔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자주 멈춰 서 있었고, 종종 아주 깊이 무너졌다.
하지만 다시 이 자리에 앉았다. 다시 써야겠다고, 다시 써야만 한다고 마음속에서 오래 맴돌던 그 한 문장이
오늘 드디어 조용히 손끝으로 내려왔다.

'견딤의 시간이 쓰임의 기간을 결정한다.’

어쩌면 그 말 한마디가 나를 다시 앉힌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까지 쓰임보다는 견딤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언제든 누구에게든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정작 내가 나를 필요로 여긴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다른 누군가를 돌보느라, 지켜야 할 자리에서 물러설 수 없어서 늘 ‘견딤’을 선택했지만, 그건 늘 내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버텨야만 했던 책임’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그 긴 시간의 견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천 년을 살아낸 나무만이 천 년의 쓰임을 허락받는다는 궁목수의 말처럼 나도 어쩌면 또다른 견딤의 이 시간만큼 세월이 더해지다 보면 책임이나 의무가 아닌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서로가 쓰일 수 있는 관계로 다시 만나기를 바라며 오늘도 지독한 그리움을 견디는 중이다.

글을 다시 쓴다는 것은 단지 문장을 적는 일이 아니다.
다시 내 안의 고요를 들여다보고, 지나온 침묵의 무게를 꺼내 보는 일이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나를 계으르게 여기지 않기로 했다. 그저 견디는 동안에도, 나는 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글씨들로,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이제 다시 조금씩 그 마음의 문장들을 세상의 말로 꺼내어 보고 싶다.

천천히, 그리고 담담히.

keyword
작가의 이전글중식당 초보 사장의 일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