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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이 Jan 04. 2024

Chap.16 예전 중국 유학 시절을 되돌아보다

feat. 화농성 한선염, 교수와의 갈등, 인격모독 

토요일에 함박눈이 내렸을 때 병원을 다녀왔다. 그렇게 눈이 많이 올 줄 몰랐는데 얼마나 많이 왔는지 한남동 일대는 미끄러워서 넘어질뻔 했다. 저번에 내원했을 때는 교수님이 다소 나를 연구대상(?)으로 봤으나 토요일에는 진료가 바빠서 그런지 그런 얘기는 나누지 않았고 주사를 고르고 왔다. 류마티스 내과에서는 휴미라, 코센틱스, 탈츠 3가지를 추천해줬고 피부과 교수님은 코센틱스를 강력하게 밀어서 코센틱스로 정했다. 탈츠의 경우 코센틱스와 똑같이 인터루킨-17 차단제이긴 하지만 화농성 한선염에 관련한 데이터는 없다. 그러나 탈츠 자체는 건선에 대해 효과가 좋기 때문에 이 약은 나중에 쓰는게 나을것 같다고 하셨다. 류마티스 선생님은 휴미라를 밀지만 우선 코센틱스를 먼저 진행하고 싶다. 교수님이 영국에 언제 가냐고 물어봤는데 아마 9월에는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고 1년을 더 미룰 수 있다고 했다. 마음 속으로는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지만..^^:;


영국을 고른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NHS를 통해서 주사제 치료를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NHS가 예약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류마티스 내과는 예약이 엄청 빡세진 않아서 한 3개월 기다리면 볼 수 있을것 같다. 만약 이어서 할 수 없다면 중간에 한국을 들어와서 보험을 살린 다음 다시 처방을 받아서 나가야 할 것 같다. 어차피 영국에 오래 있어봤자 1년이니.. 방학이 되면 한국에 들어와서 있어야겠다. 저번에 셰필드 대학교에서 휴학처리를 해주겠다고 글을 쓴적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되지 않았다. 내가 등록금을 낸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휴학이 안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걸 늦게 알려주는 바람에 내 원서 자체가 철회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학마다 정책이 다른데 셰필드의 경우 등록금을 선납금하는게 아니라 영국에 입국한 다음 학교에 와서 BRP 카드를 받은 다음 등록을 하게 되어 있다. 결국 예치금만 날리게 되었고 학과에서는 재지원을 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작년 11월에 학업계획서를 조금 수정해서 재지원을 했는데 한 2주도 안되서 바로 언컨디셔널 오퍼가 날아왔다. 이 사람들이 나를 제대로 평가하고 오퍼를 준건지 아니면 작년에 붙었는데 이리저리해서 못가게 되어서 얼른 오퍼를 날려준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영국 대학은 끝났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거 다른데도 찔러보자해서 맨체스터 대학교와 워릭 대학교를 추가로 지원을 해볼까하고 고민중이다. 2024년이 된 올해 9월에 진짜로 출국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미리 예치금을 내고 기한 내로 못가게 된다면 디퍼를 꼭 할 생각이다. 


요즘에 Reddit을 다시 시작했다. 레딧 쓰레드 중에서 건선관절염과 화농성 한선염이 있어서 가입했다. 다 영어로 써져 있어서 다소 불편한 점은 있지만 외국이나 우리나라나 환자들의 사정은 비슷했다. 그래도 한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Disablility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대학생활이 걱정된다고 올렸는데 댓글에 사람들이 대학마다 헬스케어 부서가 있으니 그곳에 연락을 취하고 Disablility를 받으라는 글이 있었다. 나도 대학을 지원할 때 장애를 체크하는 부분이 있어서 체크를 했고, 셰필드의 경우 입학 직전까지 가서 직접 그 부서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 부분을 체크하면 당장 진단서를 제출하는건 아니고 나중에 학교를 입학하고 나면 그 부서로부터 연락이 온다. 입학할 때 장애를 선택했느니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연락을 하라는 것과 함께 진단서를 제출하라고 온다. 나는 류마티스 내과와 피부과쪽의 영문진단서를 제출했는데 아주 빠른 속도로 처리가 되어 Disability를 관리하는 부서에게서 연락이 왔다. 


직접 그분과 미팅시간을 잡기도 했으며, 장애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명하는 시간도 있었다. 화상으로 진행하는 것이었으나 영문자막을 달아줬고 나중에는 못들은 사람들을 위해서 워드에 해당 내용을 전부 넣어서 메일로 보내줬다. 그리고 학생들마다 받을 수 있는 장애서비스가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학생을 담당하는 담당자와 얘기를 나누면 된다. 나는 이런 서비스가 있다는 것에 놀랐고, 이런게 우리나라에 도입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영국의 이런 서비스를 보고 있자니 내가 예전에 석사를 밟고 있었을 때, 내 질병과 고통을 인정받지 못해 교수에게 인격모독을 당했던게 생각났다. 나는 2019년에 중국 유학을 결심했었고 중국정부장학금을 받아 9월에 톈진대학교로 유학을 갔었다. 보통 사람들이 영미권으로 유학을 많이 가기 때문에 왜 중국으로 가는지 의문이 있을텐데, 우리집이 그렇게 풍족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학금으로 커버칠 수 있는 곳을 가고 싶었고 그곳은 중국밖에 없었다. 학부 교수님들은 미국을 추천했지만 GRE와 토플을 준비하는 비용부터가 만만치 않아서 중국을 선택했다. 당시에 이미 HSK 5급 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에 지원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중국은 대사관에서 진행하는 정부장학금이 있어서 3월쯤에 신청해서 1차 합격을 했고 7월에 최종 합격을 받았다. 장학금 혜택이 상당했는데 매달 생활비 50만원과 등록금, 기숙사비, 보험비가 석사 기간 동안 커버되었다. 생활비의 경우 솔직히 중국 대도시라고 하더라도 한 달에 50만원도 못버는 사람들이 허다한데 외국이 유학생에게 50만원을 준다는 것은 큰 혜택이었다. 톈진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물가가 좀 높긴 했으나 50만원이면 풍족하게 지낼 수 있었다. 


중국 유학 시절은 거의 생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선, 나도 미성숙했고 내성적이었기 때문에 실험실에 있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내가 좀 더 친목질을 잘할 수 있는 성격이었다면 적응은 좀 더 잘했을 것 같다. 그리고 당시에 영어나 중국어나 둘 다 그렇게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대화하는데 애를 먹었다. 그리고 교수가 논문실적은 상당히 좋긴 했으나 실험실은 거의 24시간이 돌아간다고 봐도 될 정도로 굉장히 빡셌다. 외국인인 나에게까지는 교수가 그렇게 심하게 대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이게 다른 사람들 눈에는 특혜로 보였을 것이다. 랩실에 나 말고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이 있었는데 그 사람한테는 교수가 엄청나게 갈궜다고 한다. 그런데 나한테는 그러진 않았고 연구와 관련해서만 갈궜다. 


교수는 연구로는 솔직히 그렇게 깔 부분이 없는데 역시나 성격이 좀 이상했다. 랩미팅을 할 때마다 얼마나 쏘아대던지.. 나는 당시 신입생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큰 공격은 받지는 않았으나 랩실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당시 이미 화농성 한선염이 발병한 다음 출국을 한 상황이었는데 중국 생활 내내 겨드랑이가 너무 아팠다. 진단을 받은 다음 출국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아서 문제가 생겼다. 고름이 터지면서 피가 너무 나와서 하얀색 블라우스가 다 피로 물들 정도였다. 국경절을 맞이해서 중국이 쉬기 때문에 나는 교수에게 말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서울아산병원에 빈자리가 있어 간신히 예약을 한 다음 진료를 봐서 "화농성 한선염"을 진단받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나는 분명히 국경절 내내 쉬고 오겠다고 대면으로 허락을 받은 상황이었는데 국경절에 갑자기 랩미팅이 잡혔다. 나는 교수에게 메시지를 보내서 가지 못한다고, 아직 한국에 있다고 했는데 교수가 랩 단톡방에 "어떤 사람은 국경절 내내 실험을 하지 않았다" 하면서 장문의 까는 메시지를 올렸다. 나는 이걸 보고 굉장히 화가 나서 다시 중국으로 출국하기 싫었다. 어쩔 수 없이 간신히 중국으로 출국을 했는데 교수가 내가 빡쳐서 메시지를 보낸거에 신경이 쓰였는지 내 사수와 함께 대화를 나누자고 해서 랩미팅 후에 얘기를 했다. 자퇴를 할까 하다가 한 달 더 다니기로 하면서 중국 병원도 가봤다. (이건 이거대로 충격이었다 여러모로..)


그러나 12월에 랩에 있는게 너무 짜증났고 교수하고도 말도 안통하고해서 그만둬버렸다. 교수는 나름 마지막에 잘 대해주긴 했으나 난 그때 인격모독을 당한게 잊혀지지가 않는다. 당시 중국어 과외를 했던 선생님도 이 메세지를 보고 나서 아주 화를 냈다. 그 선생님은 아주 착했고 한국어도 꽤 잘했고 다른 한국 사람들을 연결시켜주기도 해서 고마운 마음이 많이 든다. 선생님이 자기도 예전에 외국계 회사를 다녔을 때 중국인 상사에게서 이런 공격을 당해봤다면서 공감을 해주셨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중국인 선생님의 부모님한테도 얘기를 했는데 그 부모님도 화를 냈다고 한다. 


한국에서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가 별다른 설명을 해주지 않아서 나는 화농성 한선염이 희귀병인지 그때 당시만 해도 몰랐다. 한선염이 희귀병이라는 것은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만약 내 병이 희귀병인지 알았더라면 교수에게 더 자세하게 병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당시에는 한선염을 검색해도 포도상구균에 의한 병이라고만 설명이 떠서 균 감염으로 인해서 생기는줄 알았다. 나중에 가서야 균이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과 자가면역질환에 집중해서 연구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2월에 자퇴하고 돌아온 이후 바로 중국에서 코로나가 터졌다. 그래서 나랑 같이 장학금을 받았던 한국인들도 졸업하지 못했다. 그 뒷소식은 세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코로나 이후 입국이 불가능해져서 원격으로 수업을 하는데 참석하지 못해서 차별을 받았다는 것도 있었고, 장학금도 코로나 기간 동안 중단되었다고 한다. 코로나가 거의 중국에서 3년 가까이 되어서 제때 졸업한 사람은 커녕 자퇴한 사람도 꽤 있는걸로 안다. 나는 내가 먼저 손털고 나가게 되어서 실망했는데 나중에 보니 내 선택이 나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랩실 내에서 스트레스, 교수와의 갈등 등 여러 사건으로 인해서 한동안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고 삶의 원동력도 잃었다. 석사 학위에 대한 아쉬움으로 지금에 와서 다시 도전하는 것이므로 마무리가 잘 됐으면 좋겠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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