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형인 우리 부부는
이번 말레이시아 여행에서 작은 실험을 했다.
무계획.
예약은 첫날 숙소 하나.
그다음은 비워두기.
기분이 어떻든 계획대로 움직이는 데 익숙한 우리에게
이건 꽤 큰 모험이었다.
첫날은 무난했다.
다음 날엔 말레이시아 친구를 만나
현지인의 찐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가 진짜였다.
숙소를 예약하지 않고 직접 가보기.
눈으로 보고 결정하기.
우버에서 내려 지도를 다시 보다가
바다에 더 가까워 보이는 호텔을 발견했다.
수영장도 있다니.
우리는 아주 쉽게 마음을 바꿨다.
아,
이게 무계획의 묘미인가.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숙소는 생각보다 낡았고
해변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스노클링 장비가 무색하게
바닷속은 뿌옇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전요원도 없다.
관광객도 없다.
괜히 내가 뉴스에 나오는 건 아닐까 싶은 풍경.
결국 발만 담그고 나왔다.
"그래도 수영장 있잖아."
호텔 꼭대기 수영장으로 갔더니
아빠와 아들 한 가족뿐이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꽤 즐겼다.
그러다 보였다.
옆 건물의 훤칠하고 세련된 외관.
"저기가 우리가 처음에 보던 숙소 아니야?"
서로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우린 역시 계획형이 맞다.
P는 못 되겠다.
그런데 곧 알게 됐다.
저 건물은 우리가 보려던 곳이 아니었다.
우리가 알아보던 숙소는
더 낮고, 더 낡아 보이는 건물이었다.
순간 우리는 동시에 안도하며 웃었다.
우리는 늘 더 좋아 보이는 것과
나의 선택을 비교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혹시 우리가 힘들었던 건
상황 때문이 아니라
비교 때문이 아니었을까.
잠시 후,
"핸드폰 어디 갔지?"
해변에 두고 온 걸 깨닫고
다시 뛰어 내려갔다.
다행히 그대로 있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던 게
이럴 때 도움이 되었다.
이번 여행은 효율적이지 않았다.
동선은 꼬였고,
잔돈이 부족해 수수료를 더 냈고,
택시비를 아끼려다 오히려 더 썼다.
생각해 보면
계획을 완벽하게 세웠어도
어딘가에선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예상하지 못한 감정도 겪었다.
괜찮다고 말해주려던 남편의 장난스러운 한마디가
그날의 내 기분을 더 건드리기도 했다.
무계획은
자유를 주기도 하지만
숨겨둔 감정을 꺼내놓기도 한다.
그래도 이상하게
이 여행이 싫지 않았다.
완벽하지 않아서 더 우리 같았다.
생각해 보면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늘 계획을 세우고,
예상하고, 대비하려 한다.
혹시라도 망할까 봐.
하지만 막상 흘러가는 대로 두어도
생각보다 크게 망하지 않는다.
조금 어지럽고,
조금 비효율적이고,
가끔은 수수료를 더 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이번 여행은 무계획을 배우게 했다기보다
완벽하지 않은 나와
완벽하지 않은 당신과
완벽하지 않은 하루를
그냥 같이 살아도 괜찮다는 걸
조금 연습하게 해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우리는 여전히 계획형일 것이다.
다만 이제는, 계획이 틀어져도 우리가 틀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