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애절한 러브스토리"로 설명하기엔 너무 '완전'한 영화
무언가 기록을 남겨야만 했기에 쓰는 리뷰.
나는 이런 영화를 보고도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못 된다.
워낙 유명한 영화라 줄거리는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기도 하고,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보다는 이미 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하고 싶어
나는 내가 느낀 바를 쓰고자 한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원치 않으시는 분은 다른 글을 보아주시고, 스포일러가 상관없으신 분들은 읽어보신 후 꼭 영화를 감상하시기를.
나는 말을 고르는 것을 좋아한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콕 집어낸 단어로 표현하기보다는, '약간 이거랑 비슷한데, 이 단어로는 다 설명할 수는 없어. 근데 무슨 느낌인지 알지?' 정도의 말을 선택해 사용하는 걸 좋아한다.
상대가 떠올린 것과 내가 떠올린 것이 정확히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표현의 모호함으로 인해 듣는 사람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 감각과 상상력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점에서 상대방은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느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대니쉬 걸'을 '완전하다'고 표현하고 싶다.
'완벽'과 '완전'은 흠이나 결함이 없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다만 '완벽'은 '결함이 없이 완전하다'는 뜻으로 다소 수동적인 느낌인 반면, '완전'은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추어져 모자람이나 흠이 없다'는 뜻이라는 점에서 능동적인 느낌이 든다.
'대니쉬 걸'은 119분의 러닝타임 중 빼도 괜찮을 장면, 혹은 넣었더라면 좋았을 장면이 하나도 없다.
모든 연출이 극적인 동시에 현실적이며, 아름다운(beautiful) 동시에 평범(normal)하다.
마치 삶의 모든 순간을 꿰어야 비로소 설명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인생처럼. 하나의 육체가 호흡한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아름답고, 또 평범한 것처럼.
아래는 가장 좋았던 여섯 개의 장면. 대사 번역은 내 맘대로.
1.
게르다 : 지금이 몇 시인지 알아?
에이나르 : 당신이 다시 침대로 돌아올 시간?
게르다 : 아니. (팔에 뽀뽀하며)난 일할 준비 마쳤어.
에이나르 : 게르다...
게르다 : 뭐? 그런 표정 지으면 내가 거부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구나.
에이나르 : 날 거부하고 싶어?
게르다 : 아니. 대신 상냥하게 부탁해봐. 쉬운 사람 같고 싶지 않거든.
에이나르 : 게르다 베게너... 나의 전부. 나의 아내.
섹스를 부탁해보라는 말에 상대방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대답하는 건 옐로카드급 반칙이야...
Life와 Wife의 운율까지, 더할 나위가 없다.
'My life'라는 말을 들었을 때 게르다의 감정표현도 정말 좋았다.
2.
한스 : 에이나르도 여기 왔나요?
게르다 : 에이나르는 이런 거 안 좋아해서요.
한스 : 아쉽겠어요. 당신한테요, 내 말은.
게르다 : 별로 신경 안 써요.
한스 : 제가 당신을 저녁식사에 데려가도 괜찮을까요? 축하하는 의미에서요. 누군가는 해야죠.
게르다 : 괜찮아요. 고마워요.
한스 : 게르다, 제가 당신을 불쾌하게 했나요?
게르다 : 아니요.
한스 : (손을 잡으며) 게르다...
게르다 : 난 여전히 에이나르의 아내에요.
당장이라도 무너져버릴 듯한 상황에서 웃으며 손님들을 대하는 게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남편이었던,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자신보다 훨씬 더 위태롭고 부서질듯한 에이나르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버텼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게르다의 마음을 알아주고 손 내밀어주는 한 사람, 한스.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그는 다름 아닌 남편의 첫사랑 같은 존재.
이 모든 것을 모른 척하고 자신을 내던지기엔 에이나르를 너무 사랑하고...
조금이라도 주저하면 당장이라도 그의 손을 잡아버릴 것 같아서 빗속으로 도망치는 게르다.
누구보다 강해서 누구보다 고독했으리라.
3.
게르다 : 당신이 왔어야 했어. 이건 결혼생활이 아니야. 이런 건 같이 하잖아.
릴리 : 그건 당신이랑 에이나르지.
게르다 : 그런 멍청하고 바보 같은 게임은 제발 그만해...
릴리: 게르다, 이게 게임이라고 생각하지 마.
게르다 : 당신이 거기 있어야 했어.
릴리: 내가 어떻게? 나를 봐.
게르다 : 모든 게 당신 중심일 수는 없어. 에이나르를 만나야겠어.
릴리: 내가 돕게 해 줘.
게르다 : 난 내 남편이 필요해. 가서 데려와.
릴리: 난 할 수 없어.
게르다 : 난 내 남편이랑 말하고 싶어. 내 남편을 안아야겠어. 난 그가 필요해. 그냥 가서 데려와주면 안 돼? 최소한 노력이라도 해주면 안 돼?
릴리 : 안 돼. 미안해. …
난 당신이 원하는 걸 줄 수 없을 것 같아. 우리가 얼마나 더 이렇게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
빗속에서 한참을 있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릴리'인 채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에이나르를 본 게르다. 게임이 아닌 걸 알면서도 'Stop playing that stupid, stupid game.'이라고 말하는 게르다. '릴리'가 아닌 남편 '에이나르'가 필요하다며 가서 데려오라고, 최소한 시도라도 해보라는 게르다. 사랑하는 '에이나르'가 '릴리'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에이나르'를 사랑하기에 '릴리'도 사랑하지만,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건 '에이나르'인...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럴 수 없음을 알면서도 최소한 노력이라도 해보라고 말하는 게르다.
그의 기분이 어떨지, 마음이 어떨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게르다가 말한 '최소한의 노력'으로 화장을 지우고 가발을 벗으며 다시 '에이나르'가 되어보는 릴리. 그리고 그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릴리의 표정에 나도 목이 메었다.
4.
게르다 : 일어났구나. 기분이 어때? 여기 앉아.
릴리 : 나 가봐야 할 곳이 있어.
게르다 : 어디? 미안한데... 당신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지 더는 모르겠어.
릴리 : 알고 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해. 내가 답을 찾아볼 거야.
아주 오랜만에, 게르다를 똑바로 바라보고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이야기하는 릴리.
전 날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다정한 게르다에게 한 번 놀라고, 게르다를 사랑하기에 답을 찾아보겠다며 나서는 릴리에게 또 놀라고.
이토록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진실로 사랑하면 저렇게 강할 수 있는 거구나 싶었다.
5.
한스 : 살면서 내가 진짜 좋아한 사람이 몇 안 되는데... 넌 둘 중 한 명이야. 몸조심해. 건강해.
게르다 : 나도 당신이랑 같이 가게 해줬으면 했는데..
릴리 : 그럴 수 없어. 당신은 에이나르를 사랑하고, 나는 그를 보내줘야 해.
한스와 '릴리'인 에이나르가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에서, 명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한스는 '릴리'를 알아봤다.
처음엔 약간 당황한 듯했지만 릴리가 불편하지 않게끔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나갔던 한스.
릴리를 향한 그의 태도와 게르다를 향한 그의 태도 모두에서 그의 성품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릴리의 여정에 끝까지 함께해야 한다는 의무가 없음에도 기꺼이 함께하려는 게르다.
그리고 그게 게르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기에, 혼자서 감당하려는 릴리.
서로를 남편이나 아내로서가 아니라, 릴리와 게르다로서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
6.
(바람에 날아가는 스카프를 잡으려는 한스)
게르다 : 아뇨, 그냥 두세요! 날아가게 두세요.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게르다. 남편을 잃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남편의 성전환 수술. '진짜 여자'로 채 하루를 살지 못하고 숨을 거둔 릴리를 보는 게르다.이제 사회로부터 남편을 잃은 미망인으로 여겨질 게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진한 비밀을 간직한 채 살아갈 게르다.
내 눈에는 고통 속에 남겨진 채 살아가야 하는 게르다가 먼저 들어오는데, 게르다는 릴리의 죽음에 오열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는 건 아마도, 게르다가 릴리의 죽음을 진정 '릴리'의 죽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
남편 '에이나르'의 죽음으로 받아들였다면...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웃을 수도 없었을 거고.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다, 게르다는.
나도 이제 결혼한 지 2년이 넘었다. 지금 시점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게르다였다면, 내 남편이 릴리였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얼마 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부부 사이에는 '연민'같은 게 필요한 것 같다는 얘기를 했었다.
어떤 일로 인해 크게 서운해서 남편에게 화를 내다가, 결국 우리는 한낱 인간일 뿐이며 하루를 살아내기가 버거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 남편을 안아줘버렸다.
불쌍한 사람끼리 싸워서 무엇하나.
이 사람도 사는 게 처음일 텐데, 부족한 게 당연하지.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나와 다른 사람이고, 또 같은 인간인데 몰아세워서 무엇하나.
그런 생각.
그런 마음이 남편을 향한 사랑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했고, '진짜 사랑'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마음까지도 겪고 난 사랑이 '진짜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대니쉬 걸'을 보고 다시 생각하기로는 '진짜 사랑'이란 부서진 사탕처럼, 조각을 다 모으면 완전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한계'처럼, 죽기 전에는 모르는 어떤 것에 가깝지 않을까. 이게 진짜 나의 한계인지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기에.
우리가 '한계'라고 부르는 것은 그 순간의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일뿐이다. 더 나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더 나아가 봐야 알지만, 과거와 현재를 기준으로 보면 가장 나아간 상태.
우리는 그런 사랑을 하며 살고 있을 뿐.
'진짜 사랑'은 죽음만으로 설명할 수도, 죽음에 대한 의지로 증명할 수도,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도 아닌 것. 그렇지만 '죽음'을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닐까.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영화를 보면서 계속 주인공이 누굴까 고민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당연히 에이나르라고 생각했는데, 에이나르도 대단하지만 게르다가 너무 대단했기에.
영화는 덴마크인이었던 릴리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릴리가 첫 번째 트랜스젠더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인물이긴 하지만, 사실 영화 내에서 'Danish girl'이라는 표현은 한스가 게르다를 처음 봤을 때,
단 한 번 등장한다.
그게 내가 게르다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한 이유.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꼭 한 번 보시길 바라며.
P.S 한스 보거스같이 생겼고 내 스타일 아닌데 캐릭터가 되게 멋있음